여전히 그가 건재한 이유
나의 사춘기가 정점이었던 시절은 H.O.T. vs 젝스키스의 경쟁 구도가 극에 달한 시점으로
원만한 학창 시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두 그룹 중 한 그룹을 무조건 좋아했어야만 했다.
오히려 둘 중 누구의 팬도 아니라고 말하면 더 주목을 받는 상황이었다.
가령 NRG 팬이라거나 Y2K팬이라고 하는 순간, 과장을 좀 보태면 ‘어머어머‘하고 구경하러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 정도로 두 그룹의 인기가 대단했는데, 난 둘 중 젝키팬이었다.
그중 리더였던 은지원의 팬이었어서, 나의 이런 팬심을 같은 반 남자애들은 나를 ‘(편)은지원’이라고 부르며 내 이름으로 3행시를 지어 놀리곤 했다.
그 3행시는 다음과 같았다.
편:편은지는
은:은지원을 좋아해.
지:지*하네
지금도 어제 들은 것처럼 잊히지 않을 정도로 유치하고 강렬하다.
어쨌든, 사춘기 시절에 열심히 젝키를 좋아한 덕에, 예능 피디라는 직업도 처음 알게 되었고 먼 훗날 이렇게 <덕후가 브랜드에게>의 저자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책에 실었던 부분은 사람들이 은초딩이라고 부르는 그의 ‘진심’이었다.
사생은 예나 지금이나 명백히 범죄지만, 그 시절엔 티비 외에 스타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기에 스타의 집은 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실제로 집 앞을 지키다 바쁜 스타대신 스타의 부모님과 절친한 우정을 쌓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불가한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노숙을 자처하는 팬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경찰에 신고를 하는 스타들도 더러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은지원은 달랐다.
직접 편지를 써서 붙인 것은 물론 여러 장을 복사해 집 앞에 늘 오는 팬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SNS 따위 없는 PC통신 시절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아이돌 팀의 리더가 집 앞에 붙여둔 편지는 널리 널리 전파됐다.
실제로 이번에 출간을 하며 내 책에서도 다루게 되었는데,
‘돋보기 없이는 글자가 안 보인다’고 괜히 내 책을 두고 장난만 치던 지원오빠가 회식 때 말하기를,
“나 책 진짜 읽어봤는데, 너 진짜 덕후던데? 너무 많이 알던 데에~ 그 편지는 어떻게 알았어?”하며,
“책에 까지 실리니까 괜히 민망하더라.”하며 발그레 해져서,
“에이, 유명한 편지잖아요! 미담은 널리 알려져야죠~”하고 너스레를 떠니 특유의 앞니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 날 기분이 좋으셨는지 엠씨 합류 이후 백지영 언니와 서진이와의 첫 제작진 회식을 시원하게 쏘기도 했다.
오히려 내가 그보다 기뻤던 건 20대 초반인 FD 친구들이 줄지어 지원오빠랑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기분 좋게 한 턱 내고 사진 수십 장 찍어주고 가는 오빠한테 말했다.
(구) 오빠가 이렇게 아직 건재한 모습에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나의 깨알 주접에 “아유 뭘~”하고 수줍은 악수를 건네더니 총총 사라졌다.
팬들은 거짓도 진심도 가장 빠르게 느끼는 집단임을 잊지 말자.
팬심을 움직이는 작동 원리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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