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핑에 시선을 고정하다
영화 <사랑의 하츄핑>이라는 제목을 들은 건 두 달 전 직급연수 때였다.
같은 조였던 다른 직군의 남자 직원이 이 영화를 네 살 딸과 같이 봤는데,
유아용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거렸다는 얘기를 해주었고 사실 당시에는 큰 감흥 없이 흘려 들었다.
그 후로는 생전 관심 없던 아들이 몇 번 하츄핑 얘기를 하더니,
<사랑의 하츄핑> 예고편을 무한 재생하며 자꾸 풀버전을 보자고 졸랐다.
근데 이 걸 만 원 넘게 결제하고 볼 내용(?)은 아닌 것 같아서 버티다가 결국 내 손으로 극장 예매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주말에 들어온 극장판 <사랑의 하츄핑>
아이들도 몰입하기 쉬운 전형적인 권선징악에 기반한 스토리 전개가 시작됐다.
그중 악역인 트러핑.
‘트러블’을 일으킨다고 해서 트러핑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아래 이미지를 보면 알 수 있듯, 다른 티니핑이 핑크, 노랑 등의 러블리한 이미지인 것과 다르게 송곳니와 번개 등의 독한 데코들이 있다.
물론 더 독한 것을 많이 본 닳고 닳은 내 눈엔 이 마저 귀여웠지만... 아이들은 ‘나쁜 녀석’으로 충분히 인식하는 것 같았다
암튼, 이 트러핑도 처음부터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좌하단에 텍스트처럼 트러핑은 ‘리암왕자의 옛 티니핑’으로 왕자의 둘도 없는 짝꿍이었다.
그러나 트러핑이 ‘근본 없는 녀석‘이라는 리암 왕자의 부모님 , 즉 어른들의 편견으로 인해
혹평과 함께 성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냥 쫓겨난 걸로도 서러운데 아예 우정의 싹을 자르려는 듯,
“너의 주인인 리암 왕자가 네가 너무 싫어서 멀리 너를 두고 떠났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이 말에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트러핑이지만,
짝꿍이자 주인과도 같은 리암왕자를 성 문 앞에서 내내 기다린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어도 기다리는 걸로 묘사된다.
마치 <은행나무침대>에서 눈썹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사계절을 묵묵히 기다리며 “절대 내 친구가 그럴 리 없어 “라고 되뇌지만,
야속하게 사계절이 흘러가고
굳건했던 믿음에는 처참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 트러핑은 세상의 모든 걸 저주하기로 결심하고,
리암왕자뿐만이 아닌 ‘인간’ 자체를 불신하고 저주하는 힘든 삶을 살게 된다.
“인간은 다 배신자야. 처음에만 따뜻할 뿐 결국은 다 변하지. 특히 어린아이들은 싫증을 더 잘 내서 금방 널 버릴거야.”라며 정곡을 찌른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이 괜히 가슴 한편이 시큰했다.
상처받은 마음을 슬프다고 곧게 표현하지 못하고, 저주로 돌리고 돌려서 토해내는 마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물로 변해 성을 부수고, 하츄핑을 잡아가는 장면도 원작자의 의도대로 트러핑이 트러블 메이커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일하게 저주를 내리지 않을 정도로 지키고 싶어 했던 하츄핑마저 트러핑을 배신(?)하고
인간을 따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더없이 가엽다는 마음이 들었다.
문득, 몇 달 전 직급연수에서 40넘은 남자 직원이 눈물이 났다는 포인트가 이 포인트였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물론 내가 어린아이들이었어도 보라색의 표독스럽게 연출된 트러핑보다는 핑크색에 모든 이목구비가 러블리한 하츄핑을 선호했을 것 같다.
모든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철저히 아이들의 선호할 만한 기호학에 근거해 디자인되기 때문에 그게 합당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난 뒤 트러핑을 찾아보고 떠올리게 된 건 내가 아이에서 좀 더 어른 쪽으로 시각이 바뀐 걸까.
아이한테 나는 트러핑이 좋다고 말해봤는데, 이해가 안 간다다는 듯 “걔 나쁜 녀석인데. “라고 말하는 걸 보면 말이다.
배신으로 상처받은 마음으로, 본인의 편 단 한 명도 없이 모두를 저주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고독한 지 조금은 안다.
세상을 저주하며 드는 잠자리의 깊이가 얼마나 얕고, 이를 앙다물게 하는지
얼마나 불면의 밤을 이어지게 하는지도 안다.
그래서 난 트러핑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제목 자체가 <사랑의 하츄핑>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