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은지 피디 Oct 03. 2022

엉망이 된 아이의 지우개를 바라보며

월 200만 원 내고 학습식 영어유치원에서 방출(?)된 후기


올해 3월도 아닌 4월, 학습식 영어유치원에 아이를 보냈다.


태어나서 가본 곳은 회사 어린이집이 전부였던 아이. 심지어 재밌게 다니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계획에 없던 학습식 영어유치원에 다니게 된 건 우연히 듣게 된 회사 선배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어린이집만 다니다 초등학교 가니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어린이집은 그야말로 다치지 않게만 돌봐만 주는 곳이라서, 나처럼 후회 안 하려면 지금이라도 영유 보내



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처에 영유가 깔려있었고 유니폼을 포함해 360만 원인가를 내면 당장 입학 가능한 영유가 있었다. 전액 국가지원이 되었던 어린이집에 비해선 큰 지출이었지만 뭔가 '돈으로라도 엄마 노릇'하는 것 같은 뿌듯한 마음도 내심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눈 밑에 손톱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로 살점이 뜯겨서 오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창 프로그램 런칭 초창기라 안 그래도 아이에게 신경을 못썼는데, 상처를 보는 순간 핑 돌면서 화가 났다. 아이는 "한국말하는 선생님이 이렇게 얼굴을 꽉 잡았다."라고 했다. (*영어 유치원엔 원어민 선생님과 한국어만 하는 보충 수업용 교사가 따로 있었다.) 일단 급한 대로 '영어로만 말하는'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엔 상처가 난 줄 몰랐다고 하다가, 본인이 지퍼를 올려주다가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했다가, 한국어 수업은 그날 없었다고 했다가 오락가락했다. 이성을 상실했던 때라, 선생님 프로필 사진에 유난히 길고 화려하게 네일아트를 한 손가락에만 괜히 한 번 더 시선이 갔다.


CCTV를 안 볼 수 없었다.


CCTV를 보러 간다는 나에게 남편은, 20년 동안 나 같은 사람만 대처해 온 원장을 무슨 수로 이기려 드냐며 이미 문제가 있었더라도 그 장면은 삭제되어 있을 거라고 했다. 괜히 가서 상처만 받을 테니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동기 오빠는 그러니까 처음부터 안 물어봐도 "네가 방송국 PD인걸 꼭 얘기했어야 한다"라고 했다. 본인도 두 아이 유치원, 학교 관련된 일엔 묻지 않아도 무조건 KBS 기자인걸 먼저 얘기한다는 걸 덧붙이면서.


남편 말대로 아이 얼굴에 상처를 내는 CCTV 장면은 없었다. "어머 너어무 죄송해여 어머니임~"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원장 옆에서, 어떻게든 잡아내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신임 경찰관이라도 된 냥 몇 시간 동안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 내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상처를 내는 장면 외에 충격적인 장면은 따로 있었다. 만 5세가 안 된 아이들이 40분간 얌전히 앉아서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딴짓도 안 하고 필기도 하면서 제 자리에서.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뛰어놀기는커녕 거의 책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아이만 쉬는 시간에 일어나서 이것도 만져보고 저것도 만져보고 창문도 보고 돌아다녔고, 그 마저 외국인 교사에게 제지를 당하는 모습이 보였고 원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를 '돌발행동'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우리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7세 반이 되면서 책상에서 앉기 연습을 한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고, 앉아서 연필을 쥐고 혼자 뭔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연필을 쥐고 매일 몇 시간을 대학생이 강의 듣듯이 앉아서 있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영유 프랜차이즈 중에 놀이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서 보냈는데 내가 본 장면은 그게 아니었다.

지우개를 찔러가며 참아냈을 아이


난생처음 겪는 일방적인 강의 폭격(?) 상황에서, 아이는 지우개에 연필로 온갖 구멍을 내며 버텼나 보다. 새로 사준 지우개들이 처참하게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한테 혼났다고도 했다. 사실 나는 당시에 혼날만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서 그러지 말라고 한 번 더 혼냈다. 원장은 이런 아이를 두고, "책상에 앉아는 있지만 영어 학습에 집중은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했다. 아마 많이 혼났을 거다. 그래도 아이는 안 가겠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더 슬퍼졌다.


CCTV를 본 3일 뒤, 원장은 '아이가 학습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으며, 돌발 행동으로 영어 학습 분위기에 방해가 되고 있으니 일대일 방식의 놀이 학교를 추천'한다고 문자로 방출을 통보했다. 한 달이 채 안됐으니 360만 원 중에 300만 원 정도는 선심 쓰듯 환불해주겠다고 했다.


300만 원 여가 입금됐다.


2,3백만 원으로 편하게 엄마 노릇할 수 있겠다고 착각했던 시간. 나의 그 안일한 생각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음을 너무도 뼈 아프게 배웠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유독 자식 앞에서 악마가 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