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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Oct 11. 2022

"저기, 가방 열렸어요." 나에겐 너무 어려운 한 마디

아이를 등원시키고 남편과 매일 아침 뒷산을 오르는 게 요즘 루틴이다. 산 정상의 절에 가서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오늘도 기도를 하고 나서는데 어르신의 가방이 열려있는 게 보였다. 바로 남편에게 말했다.


"저분 가방 열렸네."


이 말은 곧, '나는 말을 못 하겠으니 남편에게 당신이 가서 직접 말해드리라'는 무언의 표현이다. 살면서 낯선 이의 가방이 열린 게 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다가가서 알려준 적은 단연코 단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았다. 일단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운 일이고, 이 어려운 일을 회피하기 위해 '일부러 물건을 꺼내기 쉽게 잠깐 열어 놨을 수도 있지(이게 말이 되나?;;)'라는 합리화이자 핑계로 이 일을 30년 이상 미뤄왔다. 오늘도 딱 그럴 참이었다.


그런데 눈치 빠른 남편이 바로 본인이 가서 말씀드리려고 하다가, "이번엔 네가 가서 가방 열렸다고 말하고 와. 너도 이제 삶을 대하는 방식을 바꿔봐."라고 했다.


이거, 아침부터 너무 큰 챌린지인데? 


순간 어지러웠지만, 나도 모르는 오기가 생겼는지 어르신에게로 다가갔다. 심지어 뭔가 고지식해 보이는 남자 중년 어른이다. 말 걸기 난이도 최상이다.


심지어 어르신은 절 마당 한가운데 있는 탑을 휴대폰으로 열심히 찍고 계셨다. 그걸 방해할 수 없어서 어르신의 팬이라도 되는 냥 쭈뼛대며 서 있었다. 사진 찍기가 끝날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말했다.


"저... 선생님, 가방이 열려있어요."

"응? (힐끔) 아, 고마워요."


크게 고마운 일도,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냥 어디서나 부는 바람을 대하듯이 자연스러운 태도.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해서 건넨 말 치고는 리액션이 엄청 싱거운 편이었다. 어색하게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데 '거봐 별 거 아니지?' 하는 표정이었던 것 같다.




낯선이 와의 시간을 어려워하고, 식당에서 주문조차 어색해하는 나를 위해 지금까지 대신 그 역할을 해주었던 사람. 이제는 나에게 너도 해보라고, 그러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아침부터 산에서 조언(잔소리)을 무한 시전 해주었다. 예전엔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거부하기 바빴다면, 이제는 해볼 수 있는 건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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