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은지 피디 Oct 19. 2022

겸손하면 호구가 되는 거지 같은(?) 이유

"은지야 지랄을 해야 돼."

일로 만나는 외부인에게는 최대한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려고 하는 편이다. 나 자체가 타고나길 대가 세지도 못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꽤 오래 몸에 밴 탓이다.

"네, 워낙 잘하신다고 들어서 저도 배우면서 잘 따라가 볼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주로 이런 태도로 대하곤 하는데 대부분 처음엔 반색하고 좋아하다가 결국은 나의 감정이 상할 만큼 선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친절을 왜 무능 혹은 주체성 없음이라고 함부로 판단하는 걸까. 나도 내 생각이 없어서 혹은 너의 말에 다 동의해서 할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닌데. 나의 분노를 누르고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을 '경청'이라고 여기고 감사하기보다는, "내 말이 먹힌다"라는 근거로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다'라는 확신과 함께 오히려 더 막대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더 심하게는 내가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했을 때 끝까지 나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존중하며 대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이럴 때 <1박2일> 조연출 시절의 선배 말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입사 5개월 차 신입사원이던 나에게 팀에서 나를 가장 아끼던 선배가 시도 때도 없이 하던 말이 있다.


은지야, 지랄을 해야 돼.

넵???!!!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선배는 늘, "그게 스탭이든 심지어 식당에서든 지랄을 해야 한다."라고 늘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내가 스탭이나 주변 사람들로 인해 힘들어할 때는 더더욱 강조해서 "거봐 내가 말했잖아. 지랄을 해야 한다니까."라고 말했다. 


그때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선배의 말이 요즘 불현듯 하게나마 와닿는 것 같아서 서글프기도 하다. 꼭 내가 애써 '지랄'하지 않아도 진심을 알아주고, 이 사람도 싫은 걸 참고 예의를 지키고 있구나라고 알아주면 참 좋은데. 


오히려 차갑거나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 사람들은 "역시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들은 대로 구만."이라고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거나 심지어 치켜세우기도 한다. 감정을 여과 없이 다 드러내고 불친절로 응수하는 것이 그 분야의 능력자임을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라면 참 서글프지 않을까. 


아 내가 그럴 자신이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회사에서 왜 '나만' 혼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