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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면 호구가 되는 거지 같은(?) 이유

"은지야 지랄을 해야 돼."

by 편은지 피디

일로 만나는 외부인에게는 최대한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하려고 하는 편이다. 나 자체가 타고나길 대가 세지도 못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꽤 오래 몸에 밴 탓이다.

"네, 워낙 잘하신다고 들어서 저도 배우면서 잘 따라가 볼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주로 이런 태도로 대하곤 하는데 대부분 처음엔 반색하고 좋아하다가 결국은 나의 감정이 상할 만큼 선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


친절을 왜 무능 혹은 주체성 없음이라고 함부로 판단하는 걸까. 나도 내 생각이 없어서 혹은 너의 말에 다 동의해서 할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닌데. 나의 분노를 누르고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을 '경청'이라고 여기고 감사하기보다는, "내 말이 먹힌다"라는 근거로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다'라는 확신과 함께 오히려 더 막대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더 심하게는 내가 친절하고 겸손하게 대했을 때 끝까지 나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존중하며 대하는 사람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이럴 때 <1박2일> 조연출 시절의 선배 말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 입사 5개월 차 신입사원이던 나에게 팀에서 나를 가장 아끼던 선배가 시도 때도 없이 하던 말이 있다.


은지야, 지랄을 해야 돼.

넵???!!!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선배는 늘, "그게 스탭이든 심지어 식당에서든 지랄을 해야 한다."라고 늘 반복적으로 얘기했다. 내가 스탭이나 주변 사람들로 인해 힘들어할 때는 더더욱 강조해서 "거봐 내가 말했잖아. 지랄을 해야 한다니까."라고 말했다.


그때는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선배의 말이 요즘 불현듯 하게나마 와닿는 것 같아서 서글프기도 하다. 꼭 내가 애써 '지랄'하지 않아도 진심을 알아주고, 이 사람도 싫은 걸 참고 예의를 지키고 있구나라고 알아주면 참 좋은데.


오히려 차갑거나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 사람들은 "역시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들은 대로 구만."이라고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거나 심지어 치켜세우기도 한다. 감정을 여과 없이 다 드러내고 불친절로 응수하는 것이 그 분야의 능력자임을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라면 참 서글프지 않을까.


아 내가 그럴 자신이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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