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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Oct 24. 2022

말 바꾸는 상사의 정신병을 의심하지 말라

1초 만에 말 바꾸는 상사나 내가 쓴 보고서를 자기 이름으로 바꾸는 상사 같은 건 드라마에나 있는 줄 알았다. 그것도 식상한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장면인 줄. 적어도 내가 겪기 전까진 그랬다.



#회사 사무실


상사 :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강호동(*나와 일면식도 없는 연예인이어서 불가피하게 예시로 사용)만큼은 절대 안 된다. 진심이다. 이건 싸워서라도 쟁취해야 된다. 출연자 하나 너 맘대로 세팅 못하면 그게 어디 피디냐? (feat. 핏대)


이렇게까지 목청 높여 말했던 나의 상사. 그리고 며칠 후 잡힌 회의. 누군가 나의 상사에게 말한다.


"강호동 씨 어떠세요?"


나의 상사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말한다.

"오 강호동! 그 생각을 왜 못했지? 그래 강호동 좋네. 은지야 강호동 씨 섭외해서 잘해보면 좋겠다. 그치?^^"


...?




요즘 술을 많이 드시더니 일시적으로 알콜성 치매라도 오신걸까? 20분 전까지 강호동 결사반대를 외치던 그 사람 맞나. 왠지 모를 배신감에 울고 싶어 졌고, 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외적인 회의 자리에서 "선배님이 강호동은 절대 안 된다면서요,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라고 말할 패기는 없었다. 아니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고 해야 할까.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말 바꾸기로 나에게 한 방을 먹인 상사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이다. 남들보다 살짝 빠른 승진과 함께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 모든 면에서 파렴치한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분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나와 나눈 얘기는 다 사실이지만) 대외적인 자리에서 한참 아랫사람인 나에 대한 신의를 챙기기보다는, 대세와 흐름을 읽고 권력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현명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회사에서 나와의 신의를 지키며 청렴하게 나와 함께 싸워줄 정의로운 그 누군가를 기대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내가 울고 싶어진 이유는, 평상시에 인간적인 교류를 했다고 착각함과 동시에 최소한의 인류애적 면모(예를 들면 거짓말하기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각자 월급 받고 사는 회사에서 왜 인간미를 기대했다가 상처받길 왜 자꾸 반복하는 걸까.


상사 중에 내뱉은 말을 뒤바꾸지 않을 사람을 찾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의 나의 상사로 남아있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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