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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Nov 02. 2022

마음을 글로 옮기는 게 어려울 때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_양다솔

독서를 하다 희열을 느끼는 순간을 꼽자면, 분명 내 마음에 있는데 글로 옮기기 어려운 것을 누군가 너무도 명쾌하게 구현해낸 문장을 찾을 때인 것 같다. 비교적 떠들고 쓰는 데는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혼자 상상했던 감정이나 마음속 풍랑을 고스란히 표현해낸 문장을 만났을 때의 기쁨 때문에 책 읽기를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근 읽은 책 중에 그런 문장들을 발견했던 양다솔 작가의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작가 나이 21세에 카톡으로 스님이 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내고 절로 들어가 버린 아빠에 대한 소회를 풀어낸 문장.

그는 암자에 내려가기 전까지 꼬박 10년 동안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살았다. 아빠는 그 직업을 싫어했다. 동료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 동료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이고 굴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할 때 보험 세일즈맨이라는 말 앞에 ‘한낱’이라는 단어를 몰래 붙인 것도 같았다.

우리 집에서 그는 훌륭한 연설가였고, 내 인생의 훌륭한 책략가였고, 언제나 기막힌 코미디언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그저 보험 세일즈맨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아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직은 더 대단한 일이 자신의 인생에 남아 있을 거라는. 그런 마음이 눈빛 어딘가에 숨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그런 그를 볼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서늘해졌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초라하게 느끼는지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하는 인생을 말이다.      

'아직은 더 대단한 일이 자신의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 아빠의 미련도 이해가 되고, 혼자 남겨져서 본인의 삶을 탓해야 하는 배우자이자 작가의 어머니의 입장도 십분 이해가 됐던 문장. 그래서 독자인 나는 더 답답했고, 실 경험자인 저자는 뒤늦게 불현듯 아빠의 부재를 실감하고 꺽꺽 울었다고 한다.

어떤 슬픔은 별의 속도와 비슷하기도 할까 생각한다. 우리가 보는 별은 사실 이미 소멸한 지 오래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사실 몇십 년 전에 뿜어낸 빛인 것과 같이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꺽꺽 울고 말았다. 그 자리는 당신이 떠나고부터 쭉 공석이라는 것을.      

사건 발생 시점과 동시에 터지는 눈물보다, 괜찮은 줄 알고 덤덤히 살다가 뒤늦게 밀려오는 슬픔의 농도가 더 짙은 법이다. 이 같은 순간에는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질 않는다.



우리 모두 겪는 '소외'에 대하여.

도매상에는 가격이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파는 단위도 적혀 있지 않다. 마치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처음부터 그들에게 알맞은 질문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최대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가격을 날마다 가게마다 사람마다 달라지고, 그걸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이게 뭐예요? 같은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투명인간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존재만으로도 길을 막는 셈이어서 “비켜요, 비켜”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게 된다. 그들의 암묵적인 규칙과 언어를 모른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괄시의 눈빛과 성가시다는 태도를 보게 된다. 이쯤 되면 알 수 있듯이 도매상은 판매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비스직이 아닌 것이다. 무지한 낯선 방문자에게 던지는 그들의 불친절은 마치 이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음을 다그치는 것 같다. 소외감으로 위축되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곳 사람들의 말투를 흉내 내려 애쓰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의 암묵적인 규칙과 언어를 모른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괄시의 눈빛과 성가시다는 태도를 보게 된다. (중략) 무지한 낯선 방문자에게 던지는 그들의 불친절은 마치 이곳에 소속되어 있지 않음을 다그치는 것 같다. 소외감으로 위축되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곳 사람들의 말투를 흉내 내려 애쓰게 되고 마는 것이다.  


->특히 위 문장에 공감이 많이 됐다. 나 자신이 소외됨을 깨닫고 늦게라도 합류하기 위해 애써 흉내 냈던 표정과 말투들이 떠올라서 잠시 아득해졌다.


그래도 유쾌한 마무리를 위해, 덕질에 관하여 쓴 문장으로 마무리할까 한다. 통 글도 좋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와닿아서 옮겨봤다. (작가는 '덕질'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편의를 위해 사용했다.)


언젠가 살다 처음으로 남자 배우에게 빠진 적이 있다. ‘퐁당’이 아니라 ‘폭삭’ 빠졌다.

간간이 이성을 찾을 때면 같은 두 명의 인간이 자본주의 시대의 매스미디어를 통해 한쪽은 한없이 커지고 복제되며 다른 한쪽은 한없이 작아지고 사라지는 과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너를 보는데, 왜 너는 나를 보지 못하니 같은 걸 울면서 시로 썼다.

그렇지만 나는 믿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한 달이면 달라질 거란 사실을. 문득 마지막으로 그의 사진을 저장했던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웃는 얼굴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를 놀라워하며.

언젠가 나는 가장 끔찍했던 이별 상대에게 말했다. “너 같은 거 한 달이면 끝이야.”


스타에 폭삭 빠지게 되면서 하게 되는 '한쪽은 한 없이 커지고, 한쪽은(나는) 한 없이 작아지는' 경험. '나는 너를 보는데 왜 너는 나를 보지 못하니'하는 통곡의 시. 그럼에도 이 모든 게 일순간 불 꺼지듯 사라질 거라고 직감하는 마음. '폭삭' 누군가에게 꽤 빠져봤던 사람으로서 모든 게 공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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