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er 0416
사람 자체가 노잼이긴 하지만 더 노잼인 일은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교양을 떠나 예능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다시 쓰는 이력서에는 막내작가로서 세 가지 프로그램을 참여하였다고 적을 수 있었고, 프로그램 이름을 하나하나 적을 때마다 뭔지 모를 뿌듯함도 마음속에 함께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디졸브 할 직장을 구하지 않고 깔끔하게 퇴사를 질러버린 나는, 백수이지만 부모님 집에 살고 있었고! 자료조사 알바를 하고 있었기에 금전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었다. 덕분에 도전해보고 싶은 프로그램류의 구직 공고만을 기다렸다.
1. 스튜디오에서'만' 촬영
→ 교양하면서 야외 vcr 진절머리남.
2.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연예인'의 출연
→ 일반인이 나오는 방송에서 내가 그 일반인이 될 수 있음.
이때는 몰랐다. 내가 '스튜디오 토크쇼'를 소원하고 있다는 것을.
예능 쪽에 인맥 하나 없던 나는, 지금은 '구성다큐연구회'로 이름이 바뀐 홈페이지에서 일을 구했다. 인생 두 번째 면접에서 나는 무조건 모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이런저런 일도 해본 적 있다면 어필하는 자신감이 대단했는데, 하지만 이내 극에 달한 긴장감으로 면접의 마지막 말로 '저 지금 너무 떨려요'라고 내뱉었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 면접은 마무리 됐다. 후에 선배들이 나를 뽑은 이유로 처음에 자신감 있게 파이팅 하는 모습이 좋았고, 후반에 진심으로 떨려하는 이상한 솔직함이 재밌었다고 하였다. 역시 면접은 자신감이다.
기획 단계에서 막내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료조사 또 자료조사 그리고 자료조사, 회의록 작성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처음 해보는 일처럼 즐거웠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첫 촬영 날이 되었다. 그 누구보다 대기실과 촬영장을 열심히 달려 다녔음에도, 흥분됨+긴장감이 뒤섞인 환장의 콜라보로 허기짐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덕분에 점심으로 준비된 도시락을 한 숟갈도 뜨지 못했다. 이 증상은 첫날뿐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녹화에서도 이어졌는데 모두가 밥만 잘 먹는데 '나만 예민하게 구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정말 쓸데없는 것이었다. 1n연차인 지금은 밥을 먹지 않으면 촬영을 하지 못하는 몸뚱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촬영에서는 하루 종일 먹은 게 물과 커피뿐일 때도 있지만, 그런 날이면 내 가방 속에는 초콜릿이나 사탕과 같은 대기실 간식들이 가득하기에. 당 떨어지면 머리가 안 돌아간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체감 중이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에 속하지는 않지만 공연, 여행과 같이 특별한 일이나, 살면서 볼까 말까 한 사람을 마주치는 것과 같은 일들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나에게도 그날이 그러하였다.
채널의 특성상 방송이 죽을 일이 없다는 이야기인 즉, 시청률과 화제성은 소소할지 몰라도 페이는 꼬박꼬박 나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어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며 점심을 먹으러 회사 구내식당을 가기 위한 엘리베이터를 탑승했다. 네모난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되어 있던 네모난 tv박스 속에서 '배', '침몰', '구조'라는 단어들이 뉴스 속보로 흘러나왔지만, 대한민국 어디선가 벌어지는 사고보다 지금 내가 하는 프로그램에 애정과 관심이 가득했던 열정막내였기에, 뉴스를 전달하는 아나운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이후 누군가가 넌지시 내뱉은 '방송 죽을 수도 있겠는데!?'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오며 가며 본 기사 속에는 전원 구조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있었고, 구조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사고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제작진들은 첫방 날짜가 옮겨질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는, 다음 녹화 준비에 들어갔다. 퇴근하는 길 또다시 마주한 엘리베이터 안 tv에서는 여전히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예능 프로그램들의 결방 소식 또한 전해졌다. 그리고 다음날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첫 방송 연기', '녹화 취소'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방송은 된다고 알고 있던 막내작가의 편협한 사고가 깨진 날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의 사건이 벌어진 4월이었다.
타 방송 프로그램들이 다시 방영될 무렵 나의 첫 예능도 방송을 시작했고, 소리 소문 없이 종영했다. 후에 나는 시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그날의 사고-참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솔직하게 내 인생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2014년 그때는 느낄 수 없었던 어른으로서 미안함과 죄책감이 뒤늦게 밀려왔다. 그 방송을 하고 난 뒤에야 분향소를 찾았고, 노란 리본 배지를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이기적인 방법을 찾은 것이다.
+ 방송작가로서 첫 예능이라 일을 하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았는데요. (물론 아닌 일들도 많음^^) 예를 들어 교양에서 예능으로 넘어간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쓸지, 첫 예능 첫 남자작가 등등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째서인지 '세월호 참사'가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