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작가에게 입봉이란
"저희는 대본이 따로 없어요~"
연출하지 않은 상황에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올 때면 종종 출연자들이 언급하는 단어 '대본'. 정말 대본 없는 방송이 몇이나 될까? 실제로 '대본'이 없다고 해도 제작진들의 머릿속에는 구성, 흐름, 분량이 나오지 않았을 때의 예비 상황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을 문서화하면 '대본'이 되는 것이다.
학생 때는 작가는 모두 대본을 잘 쓰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회의 때마다 너덜너덜해지는 선배들의 대본을 볼 때면 '영원히 막내작가'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중요한 건 학교에서 말고, 그 누구도 내게 대본 쓰는 법 A to Z를 알려준 적이 없다) 그런 내게도 드디어 '입봉'이라는 날이 찾아왔다. 요즘은 예능에서 '입봉'을 하는 게 프바프(프로그램 바이 프로그램)이며, 정해진 연차도 따로 없다고는 하지만 나는 4년 차가 되었을 때 VCR 촬영 구성안을 쓰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가장 많이 가는 장소에서 촬영하자!"
내가 첫 촬구를 써야 했던 프로그램은 해외에서 방영되는 음악오디션이었는데, 해외에서 활동하는 (많이 유명하지 않은) 현지 가수들이 한국으로 와서 경연을 펼치는 형식이었다. 나는 그 국가들 중 한 팀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을 다니는 내용으로 촬영 구성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물론, 촬영 구성안에 들어있는 장소들에 대한 섭외 또한 내 몫이었다. 바쁘고도 복잡했던 스케줄 탓에 나의 걱정과 달리 선배&PD들의 촬구에 대한 피드백은 크게 없었고, 그 프로그램을 하면서 여러 가지 촬구를 작성했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쓴 촬구는, 아니 촬구 회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해외 음악 프로그램이 끝나고, 한국 가수들이 해외에 가서 공연을 펼치는 음악 방송을 할 기회가 생겼다. 타임테이블이 짜여있는 공연이었기에 (물론 탐테도 회의를 통해 짜여지는 거지만) 공연 전 VCR로 보일 가수 소개, 공연 홍보용 VCR, coming up next 등과 같은 류의 구성안을 작성하는 것이 나의 몫이었다. 지난 프로그램을 생각하며 열심히 나의 꿈을 펼쳤고, 대망의 회의시간.
"이런 식의 멘트면 어때? 그리고 이 팀 소개를 아예 다른 방식으로 가볼까?"
'이럴 거면 컨셉 회의부터 다시 하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갓 막내를 벗어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용기는 없었다. 탈탈 찢겨 나가는 구성안들을 보고 있자니 자괴감이 밀려왔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뭐라고'라는 생각이 온몸을 지배할 만큼 자존감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나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내뱉지 못하고 '그건 그렇게', '이건 이렇게'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성안을 수정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연차가 어렸기에 대본 작성에 미숙한 것이 가장 컸겠지만, 머릿속에 이미 정답을 내놓고 있는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구성안을 써야 했기에 어려움이 더 컸다.
한동안 대본 쓰는 기계처럼 살 때가 있었는데, 나의 대본이 결코 쓸모없지 않구나 싶게 만들어준 한 연예인이 있다. 그 프로그램 역시 작가들끼리 제대로 된 밥 먹는 자리도 한번 없을 만큼 바쁘다 못해, 까딱했다가는 혼이 쏙 빠질 것 같은 상황과 스케줄을 지니고(?) 있었다. 그날의 컨셉은 출연자가 남편,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생활하는 일상 모습을 촬영하는 것, 그리고 MC들과 함께 한 주제에 대해 토크하는 것 두 가지였다. 작가는 나와 막내 둘 뿐이었고, 케어해야 하는 출연자는 총 8명이었다. 출연자 도착 시간에 맞춰 리딩 시간을 가지려 하였으나, 들쭉날쭉하게 도착하는 출연자들을 1:1로 케어하는 것은 불가능이었고 결국 PD에게 SOS를 쳤다.
"컨셉은 이렇구, 멘트는... 알아서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첫 번째로 리딩을 한 출연자에게는 오늘의 촬영의 처음과 마무리까지 멘트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하는 게 가능했지만, 마지막으로 리딩을 하게 된 '그'에게는 슛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컨셉만 빠르게 설명한 후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퉁쳤다. 실제로 나는 그를 믿었다. 방송 원데이-투데이 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장소는 한 곳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을 연출해야 했기에 소품도 다양했고, 나는 손에서 스케치북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스케치북을 들기도 전에, 나의 뇌와 동기화된 사람처럼 멘트를 해주었고 그 모습을 보며 나와 담당 PD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 순간이 여러 번 반복되자 촬영이 끝나가는 막바지에 나는 카메라 앞에 있는 그를 향해 쌍따봉을 날렸다.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상황도 다 재밌게 잘 살려주시고, 저 감동받았어요"
촬영이 끝나면 출연자들에게 인사치레로 내뱉는 '고생했다'는 말이, 그에게는 진심으로 나왔다. 그가 주차되어있는 차를 가지러 간 매니저를 기다리는 동안, 오늘 있었던 상황들 중 팔에 소름이 돋았던 타이밍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의 말을 들은 그는 촬영 때와 다른 조용한 텐션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그는 늘 카메라 뒤에서는 누구보다 진중한 모습을 보였다)
"다 너가 준비한 거잖아. 나는 대본에 쓰여있는 대로만 했는걸? 너가 더 고생했어"
비록 입에 발린 이야기였을지라도! 비록 다른 프로그램에서 날 만나면 처음 보는 제작진처럼 대할지라도! 비록 그는 자신이 이런 얘기를 했는지 모를지라도! '그'는 내 인생 가장 따뜻한 말을 해준 출연자였다. 나는 그날 그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이야기했고, 그는 흔쾌히 대한민국 누구나 아는 표정으로 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저 그때 이후로 대본 쓰는 게 무섭지 않아 졌어요"
"그래서 촬영 구성안은 어떻게 써야 잘 쓰나요?"
나의 방법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내가 쓰는 방법은 이러하다.
1. 촬영의 컨셉은 확실히. 짧은 VCR이라도 기승전결이 필요한 법. 왜 찍는지, 뭘 찍을지, 결론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을 주는 컨셉이 담긴 문장을 일단 하나 적어두고 시작한다.
2. 상황 및 멘트는 간결하게. 출연자들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떤 멘트를 하면 좋을지에 대한 내용은 구구절절 적지 않고, 최대한 한 문장으로 정리해야 보기에도 좋고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쉽다.
(+) 나는 편집 때 필요한 스케치-인서트도 적어두는 편이다. 처음 시작하는 도입에 어떤 풍경으로 시작할지, 중간중간 환기용 브릿지는 어디에 있으면 좋을지 등을 적어두면 나중에 편집할 때도 용이하고 내가 이 촬영의 흐름을 어떻게 가지고 가고 싶어 하는지가 눈에 확 띄기 때문이다. (물론 PD에게 이거 찍는 거 까먹지 말라고 적어두는 것도 있다)
사실 촬구 이렇게 써야 해! 하는 법칙은 없다. 뭐든 자주-많이 쓰다 보면 자신만의 틀이 생기지 않는가. 자신의 색깔이 담기는 촬구 틀만 잡히면 어느새 연차가 훌쩍 촬구를 쓰지 않게 되는.. ^^ 은 아니고. 촬구는 필요에 따라 연차 상관없이 써야 하는.. 물론, 촬구 그다음은 스튜디오, 통대본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오 늘 생각하지만 오늘따라 방송작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