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ringtime Apr 14. 2023

3. 섭외가 안 될 때는 혈연지연학연

여전히 극복 안 되는 전화공포증

섭외는 '운' 그리고 '타이밍'.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섭외 이후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 예를 들어 출연료 네고나 인터뷰에서 내용 뽑아내기 등은 실력이지만 장소부터 사람까지 섭외가 땅땅땅! 되는 대부분은 '운'과 '타이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 물론 섭외를 진행하기 전 '섭외 리스트'를 만드는 것 또한 실력이고.


교양프로그램을 하던 1n년 전 촬영을 허가받아야 하는 공공기관, 마트, 헬스장, 식당, 전문가, 일반인 사례자 등을 섭외하는 것이 나의 업무 중 하나였다. 학생 때의 나는 전화공포증으로 그 흔한 피자, 치킨 전화 주문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몇 년 전만 해도 배달 어플 같은 건 없었다) 작가 일을 하면서 일부 극-뽁 했다. 그럼에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에게 전화를 거는 건 지금까지도 심호흡이 필요한 행위이고, 사실 그것들이 싫어 예능으로 눈을 돌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예능은 출연자가 일반인에서 연예인으로 바뀌었을 뿐 장소 섭외는 그대로 진행한다는 것을 왜 그땐 몰랐을까. 이래서 사람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


여튼, 장소와 인물 두 카테고리에 있는 자잘 자잘하고도 다양한 섭외 리스트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때가 있다. 섭외 제안 전화, 공문을 메일로 쫙 뿌리고 2-3일 후 착착 걷어드리는 일만 하면 섭외가 깔끔하게 끝나는 것이 그런 날이고. 반대로 담당자의 부재라던지, 프로그램을 설명하기도 전에 바로 까이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이면 밤새 리스트업을 새로 하고, 다음날 컨펌받고, 또 섭외 진행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짬이 차면 리스트업 필요 없이 혼자서 섭외 방향을 틀 수도 있지만 막내 작가는 그럴 힘도 판단력도 없기에 선배들의 요구사항에 맞는 곳을 찾아서 섭외해야 한다.


요즘 건프(건강프로그램)에 나오는 일반인 사례자의 경우, 매서운 눈썰미로 보면 주기적으로 나오는 일반인 사례자들을 캐치할 수 있다. 분명 '무슨 과일만 먹고 건강해졌어요!'라고 하더니, 몇 달 뒤 '이 운동만 해서 살을 뺐어요!'라고 탈 바꿈 해서 출연하는 일명 '방송 전문 일반인'들이 그들이다. 요즘은 인스타며 오픈카톡방에서 그들의 연락처를 구하기 쉬운 세상이지만, 라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맘카페'에 주기적으로 '안녕하세요 OOO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OOO작가입니다'라는 글을 올리곤 했는데, 그 글을 보고 방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메일이나 쪽지로 출연하고 싶다는 연락을 종종 받곤 했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도, 그렇다고 내 연락을 받아주지도 않는 아주 개 가튼 날이었다.

 


  

발단은 마트 섭외 건이었다. 홍보팀 담당자가 하루종일 부재중이었고, 다른 마트들 또한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연락을 줬어야 한다는 얘기부터 방송의 방향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촬영 허가를 할 수 없다는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방송이라는 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데.. 라며 그들과 입씨름할 상황 또한 아니었다. 출퇴근길 회사 근처 작은 마트 하나를 발품 팔아 섭외해두었고, 선배들에게 최후의 카드로 내밀 내일을 상상하며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 안에 있는 쌈장 보여줄 집 어디 없나?'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아이템 '쌈장'. 그날 나는 자취방을 공개하고 싶을 만큼 퇴근이 간절했고, 섭외라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냉장고에 쌈장도 없을뿐더러 그 집은 비주얼적으로, 정확하게는 방송용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맘카페에 냉장고 속 쌈장을 보여줄 구세주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주부들에게 냉장고 공개란 아주 큰 일이었고, 그에 걸맞게 출연료만 높아졌을 뿐이었다. (물론 출연료라 하기에는 거하고, 거마비 정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회사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나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을 터. 그리고 그들의 집은 우리의 시청층에 맞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섭외의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본가' 그리고 '엄마'를 떠올렸다.


"본가가 서울이 아닌데 괜찮을까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모두들 '어디든 가야죠~'라며 나를 바라보았고, 기대감에 가득 찬 눈들이 부담 스러 사무실을 나와 엄마에게 SOS를 쳤다. 간단한 촬영이라 생각했지만, 섭외가 완료되자 선배들은 조금씩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분명 냉장고 문을 여는 모습 / 냉장고 속 쌈장 / 쌈장 제품 성분 인서트가 전부였던 촬영에 다른 집도 찍고 싶다는, 그 말인 즉 엄마의 주부 인맥으로 다른 냉장고도 섭외해보아라~라는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진 것. 섭외 연좌제에 갇힌 엄마는 인맥을 동원해 3-4집을 거뜬하게 섭외해 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현장에서 PD는 카메라를 들이밀며 '이 한마디만 해주세요'라며 현장 인터뷰까지 따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방송을 통해 엄마의 얼굴이 전국에 노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날 이후 방송에 가족을, 친구를 동원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방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내성적인 엄마를 팔아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만약에 그날 내가 엄마를 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만약에'는 생각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후회는 이불킥만 하게 되어있으므로. 그리고 상상할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저 질문의 답은 심플하다. 섭외가 되지 않았더라도 방송은 어찌어찌 됐을 것이다. 그것이 '방송'이니까 (하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2.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