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생 최초의 눈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작가의 롤과 PD의 롤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
멀리서 보면 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모인 사람들이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글을 쓰는 작가 X 연출하는 피디'로 나뉘는 게 기본 롤이다. 더 깊이 들어가 보자면 구성안과 대본을 문서화하는 것은 작가의 롤이지만 구성안을 쓸 때 큰 틀을 잡는 것부터 작가가 하는 팀이 있는 반면, 피디와 함께 또는 피디가 문서화된 틀을 가지고 있는 등 진행하는 방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섭외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작가들이 전담하고 있지만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피디가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한 가지 일을 두고 서로 일을 나눠서 할 때도, 가끔은 '네'일 '내'일 할 때도 있는 것이 방송이다.
그렇기에 메인 작가와 메인 피디의 사이가 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만약 그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은 팀이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루라도 빨리 발을 빼야 한다는 것. 내가 그 두 사람의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등의 이뤄지기 힘든 꿈은 버리는 게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팀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잘 타야 하는데, 경험 제로였던 막내작가인 내게 그 정도의 눈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막내로서 6개월 차가 되었을 때 내가 하는 일은 보도자료 작성, 프리뷰, 일반인 섭외, 자료조사, 인터뷰 등이 있었고 손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촬영장에서 현장 조율을 하는 것도 나의 업무였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내가 촬영장에 나간다는 것이, 막내 작가가 혼자 촬영장에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오게 될지.
고요한 새벽, 본가에서 회사까지 1시간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조용히 집을 나섰다.
촬영 날이면 늘 그러하였듯, 대본과 소품을 체크하고 메인 작가님께 문자를 남겼다.
(*당시, 메인 작가님과 나이차이가 꽤나 났기에 작가님이라 불렀다)
'작가님! 촬영 다녀오겠습니다'
지방에 있는 촬영장으로 우리를 데려다줄 기장님이 도착하고 차에 타기 직전,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네! 작가님!'
'너 왜 촬영가?'
'???'
'누가 촬영 가래!!?'
예상치도 못한 메인 작가의 고함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있었다. 그러자 메인 피디는 무슨 일이냐며 내게 상황을 물어왔고, 나 또한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근데 오늘 촬영 가는 날이라서...'
'너 가지 말고 기다려'
통화가 끝나자마자 메인 피디의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고 촬영 스태프들과 멀찍이 떨어진 그는 통화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의 한숨과 표정이 그 통화가 어찌 흘러가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길고도 짧은 통화를 끊은 그는 내게 오늘은 촬영을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며 다녀와서 보자고 이야기했다. 넋이 나가 주차장에 덩그러니 서있는 나를 숙직실까지 넣어주는 그를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억울함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더 이상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다른 프로그램 팀원들과, 회사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되자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게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그것도 반만. 퉁퉁 부은 눈을 가지고 화장실로 달려가 열심히 가라앉기 바라며 마사지를 했지만 누가 보아도 슬픈 사연으로 인해 밤새 펑펑 눈물을 흘린 눈이었다. 덩그러니 앉아있는 내게 이전 프로그램을 함께한 선배가 '괜찮냐'며 점심을 먹으러 나가자는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녀는 나를 데리고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그때도 나는 그걸 거절하지 않고, 나가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캐물었어야 했는데 그때의 나는 눈물만 많은 막내 작가였다. 하지만 나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선배 작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즘 둘 사이가 안 좋았는데, 너가 재수 없게 낀 거야'
'저는 매번 촬영장에 갔으니까.. 오늘도 가는 줄 알고..'
'그래 맞아. 만약 너가 안 가는 걸로 정리 됐으면 말했겠지. 근데 그 피디는 너를 데리고 싶어 하고.. 작가는...'
그 뒤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억울했다. 나의 잘못이 아닌 둘의 주도권 싸움에 희생양이 되다니. 두 메인의 기싸움이 되는 동안 눈치를 못 챘다는 것까지. 점심을 먹고 난 뒤 돌아온 회사에서 나는, 동네방네 소문난 '촬영 날 회사에서 운 작가'가 되어있었다. 그 이후 그들이 내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을 뿐.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나는 어떠한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거나 떠올리지 않고 살면 금방 잊어버리는 멋진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리고 나는 그 팀에 '정'이라는 게 떨어져, 그만두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다. 물론 한번 붙잡혀 6개월을 더 일하다 나왔지만. (*촬영장도 다시 나갔다...)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우는 후배들을 동기들을 만나곤 한다. 일이 힘들어서 나는 눈물일 때도 있고, 억울함에 흘리는 눈물일 때도 있다. 나 또한 작가 일을 하며 몇 번 더 열에 받쳐, 악에 받쳐 '내가 왜 이런 취급을?'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분명 눈물을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하루종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괜찮아?'였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작가 인생 첫 눈물을 흘리고 내 이야기가 남들의 안주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나는 다신 작가 일을 하며 현장에서 울지 않겠다 다짐했고, 내 잘못이 아닌 일에 '죄송하다' 사과하지 않겠다 생각했고, 무슨 일이든지 선배에게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증거를 남기는 습관이 생겼다. 회사에서 흘리는 눈물이 그 순간에는 위로와 동정을 받기도 하지만, 어떤 이야기가 덧붙여져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거하게 낼 칼로 돌아올 수 있으며 그것이 내 커리어에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방작에게 눈물은 무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