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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soho Feb 26. 2019

39만 원짜리 개인정보 1

“안녕하세요. ○○○영화협회입니다.”


낯선 번호로 전화를 받았을 때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었다. 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사람의 전화가 아닐까 하고.


“혹시 3년 전 공모전에 작품 내셨죠?”


훗. 당선된 건가.

그런데 심사를 3년이나 하는 곳이 있다고?


이때 머릿속에 라바를 닮은 노란 자벌레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숙취로 힘들 때나 잠이 덜 깼을 때, 혹은 판단회로가 엉켜버렸을 때 종종 나타나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녀석. 라바가 좌뇌에서 우뇌 쪽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그러다 웬 웅덩이 앞에서 멈추더니 휙 뒤돌아 나를 빤히 쳐다본다. 콧구멍은 벌렁벌렁, 입 꼬리 한쪽이 위로 쭉 올라가서는,


비.웃.었.다.


분명 날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웅덩이에 코를 박고 그 안의 물을 진공청소기처럼 쭉쭉 빨아 마신다.


갑자기 웬 물을 저리 마시지?


실룩실룩 흔들리는 엉덩이에 붙어있는 포스트잇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너 물 먹었잖아~



부들부들. 저기 웅덩이 너머 라바가 물을 마시고 있다.  그래, 나 물 먹었다. 그게 뭐!



열 받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3년 전 공모전은 물 먹었었다. 솟구치는 짜증을 간신히 부여잡고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냈던 건 맞는데... 왜 그러시죠?”

“그게 저희 쪽 실수로...”


이제야 인정하는구나.

내 작품 떨어뜨린 거 실수였다는 거, 뭐 늦게 인정하긴 했지만 00 영화협회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라바! 너 물 그만 마셔라. 나 물 먹은 거 아니라고. 늦었지만 상금도 받을 거고... 오! 그때 상금이 얼마였더라.


“39만 원...”

“네에? 39만 원요?"


순간 39만 원 밖에 안 되냐고 따질 뻔했다. 그렇게 속물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슨 공모전 상금

이 39만 원인가.


“작가님과 동명이인인 스텝한테 들어갈 39만 원이 저희 쪽 실수로 잘못 입금된 것 같습니다.”


뒤늦게 인정은 무슨, 물 먹었잖아 ㅋㅋㅋ

라바는 낄낄대더니 기어이 물을 원샷, 꺼억 트림을 날린다. 얄미운 저 녀석을 꺼내 패대기치고 싶지만

우선은 네 거인 듯, 네 거 아닌, 네 거 같은 39만 원의 행방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인터넷 뱅킹까지 확인했지만 39만 원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요. 00은행 0503으로 시작하는 계좌로 작가님께 보냈거든요.”

“00은행은 맞지만 계좌번호가 틀립니다. 다른 동명이인이 또 있나 보죠.”

“그럴 리가 없는데. 우선은 알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니.


동명이인은 말 그대로 이름이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내 이름은 우리나라 인구의 1/4 정도가 쓰는 흔한 성씨에다 원래 이름* 역시 흔하디 흔했다. 학교 다닐 때 새 학기가 될 때마다 나와 이름이 같은 불쌍한 동지는 ‘누군가’가 아닌 ‘몇 명이신가’를 세어봐야 했다.


예를 들어 큰 해영이, 작은 해영이, 오해영A, 오해영B, 또 오해영** 등등. 한 마디로 동명이인은 2명 일수도, 3명, 4명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럴 리가 없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거. 울화통 게이지가 차올랐지만 어차피 39만 원은 입금되지 않았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잠이 더 급했다. 그런데.



드르륵.


막 잠이 들려는 찰나 휴대폰 진동이 날 깨웠다. 또 00영화협회에서 온 전화였다. 역시 안 기다리는 전화는 결코 시간, 장소 따위 따지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는데.’


직원의 미심쩍어하는 목소리가 갑자기 생생하게 떠올랐다. 설마 내가 돈 받아놓고 떼먹는 거라고 생각한 건가.


사람을 뭘로 보고!


울화통의 게이지가 가파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시 전화를 거니 안 받는다.


이거 혹시 신종 보이스 피싱 아니야?


우아아아악!  이제 잠은 다 잤다...울화통 게이지 쭉쭉 올라가십니다.





* 이 에세이가 잘 돼서 출판 기념회 및 사인회를 하게 되면 밝히고자 한다. 독자를 위한 깜짝 서프라이즈라고 할까나...는 개뿔. 그냥 작가적 신비주의...도 개뿔. 근데 개뿔의 어원이 궁금해 찾아보니. 개의 불x이란다. 그럼 개뿔말고 개가 예쁘다의 줄임말로 '개쁠'로 써볼까... 그럼 개의 불x이 예쁘다가 되려나.


** 좋아했던 드라마 제목. 동명이인인 예쁜 오해영 때문에 인생 피곤해진 또 오해영이 주인공이다. 무척 재밌는 드라마였지만 극 중 주인공의 대사 하나는 어리둥절. “난 왜 이리 흔한 이름인 거야?” 이런 비슷한 대사였던 것 같은데 오씨가 흔한가? 게다가 해영보다는 혜영이 더 흔하지 않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본명에 비한다면 진짜 오해영은 흔한 이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내 본명이 궁금하지 않은가? 궁금했으면 좋겠고, 에세이도 잘 됐으면 좋겠다. 그래요, 저 속물이에요. 오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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