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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생일에 부쳐

창백한 푸른 점에서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생

by 딱정벌레
사진=위키피디아

칼 세이건의 '패일 블루 닷'을 처음 접한 계기는 지난해 5월 미국 워싱턴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블루 오리진' 우주사업 발표였다. 이날 발표 현장에서는 제프 베조스가 나와서 달 착륙선 '블루문' 실물모형을 공개했다. 2024년까지 달에 인류를 다시 데려갈 거란 계획도 같이 발표했다. 난 베조스 멘트를 다 받아쳐서 기사로 썼다. 모든 멘트를 다 쓰지 않았고 남길 건 남기고 버릴 건 버렸다. 멘트만 넣지는 않았고 중간중간 맥락을 설명해서 글을 썼다.

이날 발표는 여러모로 울림이 컸다. 베조스는 자신이 1994년 아마존을 창업할 때는 페덱스나 UPS 같은 인프라가 많았지만 우주 사업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미래에 우주 기업가가 나와야 하고 이를 위해 자신이 우주 기업가를 위한 인프라를 깔겠다고 했다. 블루 오리진과 달 착륙선 블루문이 그 수단이었다. 베조스는 위성 사업에서도 비슷한 입장을 견지한다. 취약한 인프라를 확충하는 일을 아마존 같은 큰 기업이 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무엇보다 이날 발표 백미는 베조스의 마지막 멘트와 참고 사진이었다. "큰 일은 작게 시작합니다(Big things start small)"란 멘트와 함께 초창기 아마존 사무실에서 문짝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30대 베조스 사진이 나왔다. 난 베조스의 우주 사업관에 동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발표 내용과 구성은 훌륭했다. 감동도 있고 여운도 남겼다. 큰 기업에서 먼 미래를 내다보며 취약한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 나서는 모습도 멋졌다.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지만. 스스로 위축될 때 그 발표문을 보면 용기가 생겼다. 아버지도 그 기사를 좋아하셨다.

사진=블루 오리진

그날 연설 골자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달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욕심은 무한한데 지구 자원은 유한하다고. 이미 지구는 한계에 왔으니 지구를 살리기 위해 달로 가야 한다고. 난 이런 세계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욕망을 다 긍정하고 부추겨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원이 유한하면 욕망을 조절해야 한다.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베조스도 그렇게 생각지 않을까 싶지만. 욕망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우주로 길을 내고 위성도 띄우며 인류가 달에 돌아가야 한다' 이런 논지를 펴는 듯하다.

글의 중심 내용은 베조스가 아닌데 그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다. 어쨌든 그는 이날 발표에서 지구를 향한 애정을 밝히면서 칼 세이건 '패일 블루 닷'의 구절을 언급했다. 이는 거대한 지구에 비해 인간이 미미한 존재임을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베조스는 이를 언급하면서 "이제 인간은 작지 않고 거대하다"라고 반박했다.

지구는 최고의 행성입니다.
지구를 보세요, 놀랍습니다.
짐 로벨은 아폴로 8에 탄 내 영웅 중 하납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는데요.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죽으면 천국에 가고 싶다'라고.
'그러나 난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천국에 온 거라고'.

지구는 천국입니다.
칼 세이건은 굉장히 시적이었는데요.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과
당신이 들어본 모든 사람들,
이제껏 살았던 모든 인류가
이 푸른 점에서 그들의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
거대한 우주광장 속 매우 작은 무대였다'


베조스는 이 어록을 반박했지만 이 문장은 지금도 내게 감동적이다. 베조스 말대로 표현이 시적인 까닭도 있다. 그러나 거대한 지구에 비하면 미약하기만 한 인간이지만. 그 인간이 제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아름다운 지구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울 때가 있다. 지구보다 작더라도 저마다 열심히 삶을 살아내는 개개인이 모두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느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말이다. 생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눈물겹기도 하니까.

칼 세이건(왼쪽)과 패일 블루 닷. 사진=교보문고(왼쪽), 아마존닷컴

개개인에게는 자기 자신이 다 소우주다. 이런 인식은 때로는 과도한 자의식과 자기 연민을 낳아서 위험하지만. 모두에게는 스스로가 소우주라 하더라도 지금껏 창백한 푸른 별에서 살아온 세상 모든 인류가 기억되는 건 아니다. 주로 잊힌, 거론조차 되지 않은 존재가 많다. 이소라 '트랙 9' 노랫말처럼 '나는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태어났고 태어난지도 모르게 그렇게 잊힌다'. 그런 존재이지만 그래도 이 별에서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는 사실, 그 안에서 느낀 희로애락, 여러 가지 이유로 벅찬 순간을 생각하면 짠하다.

패일 블루 닷의 그 구절은 그렇게 잊었다. 그런데 오늘 테크 M SNS에서 패일 블루 닷의 위 구절을 인용하면서 오늘(11월 9일)이 칼 세이건 생일임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광활한 우주 속 너무나 작은 우리의 고향에서 서로 더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시길.. 故 칼 세이건 선생님의 생일날 테크 M에서 전해드립니다'라는 메시지가 이어졌는데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최근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해보고. 인생에 회의감도 느꼈고, 특히 내가 살아온 방식에 회의감이 컸는데 그게 힘들었다. 내 삶의 가치도 돌아보고.

패일 블루 닷 구절을 다시 읽고 테크 M 메시지를 보니 지금껏 걸어온 길을 다 부정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 시행착오도 있지만 그걸 다 어리석게 보지 않아도 된다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감정과 세월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풍 같은 인생이지만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니까. 더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자고. 최근 미국 대선이 마무리되면서 여기저기서 대선 리뷰를 많이 한다. 라디오로 신임 부통령 당선자 연설을 듣는데 희망과 가능성을 내세우는 메시지가 인상 깊었다. 선거 특성상 그럴 수 있고, 한철 멘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끔 아메리칸드림이 나쁘지 않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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