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일을 회피하고 싶을 때
좋은 결과는 일상을 성실히 살았을 때 나온다
사진=픽사베이그럴 때가 있다. 생산성은 마감이 임박해서야 높아지고, 일도 그때 더 집중이 잘 된다. 시간을 두고 미리 진도를 많이 빼놓으려고 계획을 짠다. 그러나 하나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느라 빨리 진척되지 않을 때가 있다. 중요한 일을 마무리해야 할 기한이 다가올 때도 비슷하다. 이를 시작부터 마감 모드로 미리 해치우면 정말 좋을 텐데. 시간은 여유 있는데 부담감 때문에 진도를 빨리 못 나갈 때가 있다. 찔끔찔끔 또는 천천히 하다가 도무지 물러설 수 없는 시점까지 가야 발동이 걸리고 속도를 확 높인다. 일을 잘 못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숙제는 중요한 일이 주는 부담감을 어떻게 잘 다독이며 업무 속도와 생산성을 높이냐는 거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난 자신에게 마음의 준비(?) 핑계를 댈 때도 많았다. '어려워서 그래', '좀만 더 조사해보고', '이것만 더 읽어보고', '생각 좀 더하고', ' 마음 좀 다듬고' 등. 사실 이런 핑계를 대는 것도 일의 중요성과 거기서 오는 부담감 영향이 크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일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더 찾아보고 조사하고 싶어 한다거나. 어떻게 풀어갈지 더 고민한다거나. 준비만 실컷 하다 본 게임에 천천히 등판한다. 비겁한 변명이다.
요즘 내 문제도 그렇다.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있고 일정이 다가오고 있다. 빨리 본 게임을 시작했어야 하는데 조사 일정이 너무 길었다. 조사가 효율적이고 쓸만한 결과를 냈어야 한다. 주제를 선정하기 전 1차 조사, 주제를 선정하고 난 뒤 2차 조사, 초고를 쓰고 난 뒤 사실관계 확인 겸 3차 조사 이런 루프를 타곤 한다. 개인적으로 3차 조사까지 가지 않는 게 좋거나 최소화하는 게 좋다고 본다. 시간이 길어지고, 3차 조사까지 하는 건 2차 조사가 충실하지 못했다는 의미니까. 슬프게도 최근 몇 개월 3차 조사로 보완한 내용이 많았다.
사진=픽사베이이번에는 기존과 성격이 다른 주제를 선정했다. 글을 쓰고 전개하는 방식도 다를 듯. 예상치 못한 문제점에 봉착할 수 있다. 2차 조사가 부족해서 3차 조사로 보완해야 한다거나, 글로 충분히 쓸만한 내용이 아닐지도 모른다거나. 글을 빨리 시작해야 이를 알 수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고통의 연속이다. 초고 작업과 퇴고 1 작업이 그렇다. 초고는 못 생겼고, 퇴고 1은 개선해나가는 과정이 용기를 주지만 몰골을 계속 마주해야 하니 자괴감 들고. 저걸 어찌 고치나 한숨 나오고. 근데 그걸 또 마주하며 하려니 기꺼운 마음보다 피하고 싶은 거다.
어떤 일로 시달리고 지치면 보상심리 때문에 내게 관대해지고 싶다.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휴식하거나, 일 생각을 후순위로 미루거나, 출력을 핑계로 입력에 몰두하는 등. 그걸 적당히 해야 하는데- 11월 후유증을 핑계 삼기에는 시간이 꽤 지났다. 게으름의 문제다. 지적 게으름, 정신적 게으름, 신체적 게으름. 어떤 문제가 발생한 건 아니고 하면 되지만- 내 시간이 나만의 시간은 아니기에. 내가 믿는 절대자가 있으며, 그 절대자 시선에서 이런 내 모습은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러라고 네게 24시간을 준 게 아냐. 불성실하다, 너무.
자괴감 느끼고 고민할 시간에 뭐든 시작해야 한다. 지금 이런 글을 쓰는 시간도 사치일 수 있다. 다만 저번에 글이 안 써질 때 드는 10가지 생각이란 글을 썼듯-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방황하는 자신을 다잡는 데 도움될 때도 있다. 그러길 희망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요즘 '창조력 코드'라는 책을 읽는데 수학자가 쓴 책이다. 창작할 때 영감을 핑계 삼기보다 평소에 계속 고민하고 구상하거나 낯선 걸 경험했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내용이 나온다.
사진=북라이프결은 다르지만 난 이렇게 해석했다. 휴식이 머리를 트이게 하고 좋은 생각을 떠올리는 데 도움될 수 있다. 책 읽거나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러나 일상을 성실히, 충실히 살아가고 평소 고민이 축적돼야 그런 경험을 계기로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빨리 진도를 못 빼더라도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부림쳐야 일이 된다는 것. 일 스트레스를 마주하기 싫어서 회피하거나, 본 게임을 미룬다고 일에 잘 집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건 필연이고, 이를 잘 견뎌야 한다는 것.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수학자인 가우스는 창조 과정의 흔적으로 필사적으로 감추는 편이었다. 1798년 가우스는 역대 최고의 수학서라는 <<정수론 연구>>를 써서 현대 정수론을 창시했다고 인정받았다. 이후 가우스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는지 알아내려고 그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 책은 <<일곱 봉인의 책>>으로 불리기에 이르렀는데 가우스는 마술로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내듯 뚝뚝 아이디어를 내놓는 듯했지만 어떻게 마술을 부렸는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누가 이에 대해 묻자 그는 건축가란 건물을 완성한 후에 가설물을 남겨두지 않는 법이라고 대꾸했다. 가우스는 라마누잔처럼 자신의 중요한 발견을 '신의 은총' 덕분으로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나로서는 내가 앞서 알고 있던 사실을 성공의 열쇠로 이어준 맥락의 본질을 밝힐 수가 없다.' 하지만 예술가가 자신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예술 행위는 자신의 무의식적 사고 과정을 구성하는 무수한 논리 게이트를 의식적으로 표출하는 일이다.
가우스에게도 생각과 생각을 잇는 논리적 맥락이 물론 존재했다. 단지 자신의 속내를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뿐이다. 아니면 비밀로 간직해 창조적 천재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싶었거나. 영국의 시인 콜리지는 마약을 하고 환각에 빠진 상태에서 <쿠블라 칸>의 시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고 주장했지만 온갖 준비 자료를 보면 가까운 도시 폴록에서 누가 찾아오는 바람에 시를 미완성으로 남기게 된 운명의 날 전까지 사실은 그가 사상을 계속 가다듬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순간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된다. 나의 창조 행위를 이야기하더라도 수년간 진행해 온 준비 과정보다는 영감이 번쩍 떠오른 순간에 중점을 둘 것이다.
우리는 창조적 천재를 낭만화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예술가는 혼자 일하는 고독한 존재라는 생각은 사실 근거 없는 통념이다.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이는 현상 대부분은 알고 보면 지속적 성장이다. 영국의 음악가 브라이언 이노는 천재가 아닌 '풍재'라는 개념을 이야기하며 창조적 지성을 자주 배출하는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미국 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도 이에 동의한다. '창조적인 일은 과학 연구와 마찬가지로 공동체 활동, 즉 개인이 여럿의 목소리를 표현하려는 시도, 종합하고 탐구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우스(왼쪽), 콜리지의 '쿠블라 칸'. 사진=위키백과, 하퍼페레니얼 클래식 난 여기서 말하는 수학자나 시인처럼 창조적 일을 하는 건 아니다. 정말 새로운 내용을 쓰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읽기 쉽게 엮고 축조할 뿐이다. '좀 더 나은 전개 방식은 없을까?',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는 방법은 없을까?', '읽으면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문장을 내가 새로 쓰는 건 창의적 일지 몰라도 말이다. 난 이들처럼 창작 과정이나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과정을 낭만화할 구석도 없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듯- 버벅대고 일이 빨리 진척되지 않더라도 종합하고, 탐구하고 분석하며 꾸준히 밀고 나아가야 한다.
"...(중략) 내가 학생들에게서 창조력을 끌어내려는 비법은 보든이 식별한 창조력의 세 유형에 근거한다. 탐구는 아마 가장 뻔한 방법일 것이다. 먼저 우리가 현 위치에 이른 과정을 이해한 다음 지평을 조금 더 넓히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껏 창조해 온 것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그런 깊은 이해 속에서 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언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한 창조 행위를 수반하는 대변혁은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명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창조적 변화는 대부분 서서히 일어난다. 고흐도 이렇게 썼다. '위대한 일은 충동적으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자잘한 일이 합쳐진 결과로 이루어진다.'
보든이 말한 둘째 유형인 접목적 창조력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종종 학생들에게 자기가 씨름하는 문제와 무관해 보이는 분야의 세미나에 참석하거나 논문을 읽어 보라고 권한다. 동떨어진 수학 영역 분야에서 빌려 온 사고방식이 당면 문제와 부합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오늘날 아주 창조적인 과학 연구 중 일부는 학문 사이의 접점에서 진행된다. 우물 밖으로 나와 생각과 문제를 공유할수록 창조력이 커질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바로 따기 쉬운 열매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언뜻 보면 변혁적 창조력은 전략으로 이용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취지는 기존 제약 중 일부를 버려 현 상태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체계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기본 규칙 가운데 하나를 바꾸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해 보라. 물론 이는 위험한 순간이다. 체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창조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야기해야겠다. 바로 실패를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실패를 각오하고 있지 않으면 기존 틀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새로 창조할 기회가 될 위험을 무릅쓸 수 없다. 그래서 실패를 몹시 꺼리는 우리 교육 제도와 사업 환경은 창조력을 키우기에 매우 나쁜 환경이다. 나는 학생들에게서 창조력을 끌어내려면 실패를 성공 못지않게 축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실패담을 박사 학위 논문에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학생들과 면담할 때 나는 사뮈엘 베케트가 남긴 당부의 말을 누누이 전하곤 한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더 낫게 실패하라.'"
고흐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 사진=픽사베이새삼 느끼는 거지만 고흐는 꾸준함의 대가다. 누가 알아주지 않을 때에도 꾸준히 그리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가 꼭 사후에만 인정받은 건 아니고 생전에도 인정받았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어록을 보면 '어렵겠지만 계속해보겠다'는 마음가짐을 밝힌 게 종종 눈에 띈다. 그렇다. 글도- 참고자료든, 내 초고든 꾸준히 탐구하고 고치는 등 그렇게 자잘한 일이 합쳐져야 완성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기 위한 수단(?)이지만- 내 경우에 낙하산 적용하면 이렇다.
무질서하고 너절한 초고가 실패 같지만 그게 최종 완성본을 창조하는 데 마땅히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고 필수 요소라고. 처음부터 완벽한 건 없으니 보면 한숨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고 개선하고 더 잘 만들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면 된다고. 그 과정이 지리멸렬하고 스트레스받고 싫어서 최대한 미루고 싶거나 피하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난 좀 심했다고. 이 글도 다시 읽어보니 스스로도 쪽팔려서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다 쓰지는 못하겠는데 자신에게 혹독한 척 자기 변명하는 비겁함 일색이다. '내팀내까' 정신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