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안양천에 뜬 초승달. 사진=딱정벌레올해는 예년보다 산책을 자주 했다. 덕분에 풍경 사진을 자주 찍었다. 그중에서도 하늘 사진을 많이 촬영했다. 산책을 주로 저녁에 하다 보니 밤하늘 사진이 많다. 공기가 좋지 않으니 별은 잘 안 보여도 달은 많이 봤다. 초승달, 반달, 보름달. 수퍼문도 보고 횡재했다. 해지고 나서 밖을 나서면 햇볕도 직접 못 쬐고 손해 본(?) 기분이 든다. 산책은 햇빛 쨍쨍할 때 하는 게 좋다고. 그것도 틀린 건 아닌데 난 해질 무렵 산책하는 게 좋다. 요즘으로 치면 오후 5시쯤? 다양한 하늘빛을 볼 수 있고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나와서 일몰 산책을 선호한다.
한때는 까맣고 짙푸른 밤하늘에 뜬 달만 예쁜 줄 알았다. 절반은 사실이다. 그러나 늦은 오후부터 해질 무렵 사이에 산책을 하다 보니 새로운 게 보였다. 이때는 하늘빛이 파란색에서 연한 하늘색, 연한 분홍색, 연한 회색으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짙푸른 색이 되는데. 하늘이 연한 하늘색 ~ 연한 회색일 때 뜬 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로소 깨달았다. 밝은 하늘을 뒤로 새하얗게 뜬 달을 보면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든다. 마음이 조금 시리기도 하고. 언뜻 보면 사과 깎아놓은 모습 같기도 하고. 그래도 이제는 해가 지기 전 하늘에 뜬 달이 더 좋다.
몇 주 전에는 주말 늦은 오후 산책을 나섰다가 이 문단 아래에 있는 사진에 나온 달을 봤다. 마치 나뭇가지에 달이 걸린 느낌도 들었다. 까만 하늘, 밝은 달 통념을 깬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저 사진을 건졌다. 초승달, 반달, 보름달 등 종류가 다양한데 아무래도 초승달이 예쁘다. 특히 눈썹달일 때. 너무 크고 둥글면 과한 느낌이 든다. 수퍼문을 볼 때는 달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크다 싶었다. 너무 위풍당당. 초승달은 크기가 적당해서 보기 덜 부담스럽다. 이를 배경 삼아 사진 찍으면 아기자기한 멋도 있고.
사진 1번 몇 주 전 동네에서 찍은 초승달, 2번 지난 봄 안양천에서 본 초승달. 사진=딱정벌레 토이 노래 중에 '나는 달'이라는 노래가 있다. 지구에게 보내는 노래로 추정되는데- 지구를 향한 짝사랑 이야기 같다. '나는 달 언제나 같은 거리를 다가설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데'. 가사가 재치 있고 문학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목소리가 예쁜 이규호 님이 불렀는데 그분 보컬과 노래가 잘 어울렸다. 보아 '넘버원'도 달에게 보내는 노래라고 들은 듯. 그 노래도 가사를 잘 썼다. 달과 관련된 노래가 많다. 'Can't Fight The Moonlight(리안 라임스)'나 'Darkside Of The Moon(핑크 플로이드)', 'Under The Moonlight(트래비스)'이나.
언제부턴가 달을 볼 때마다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별 생각은 없고 '오늘 달이 참 예쁜데 저 사람도 이 달을 봤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궁금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마음이 시리기도 하고. 올해는 몇 년 만에 비행기를 한 번도 안 탄 해이기도 했다. 텀블러 블로그를 오랜만에 보다가 예전에 내가 메모했던 책 구절을 여럿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였다. 달 사진, 하늘 사진을 보니 조종사 출신인 생텍쥐페리 비행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지난 여름 한강에서 찍은 보름달. 사진=딱정벌레"만약 비행이 평탄한 경우라 할지라도 정기 항로 중 어딘가를 항해하고 있는 조종사에게 보이는 건 단순한 풍광이 아니다. 땅과 하늘의 저 색채, 바다 위를 스치는 바람의 자취, 황혼의 황금빛 구름들은 승무원에게 경탄의 대상이 아닌 숙고의 대상이다. 자신의 땅을 휘돌아보는 농부가 1,000가지 징조를 보고 봄이 오리라는 것을, 서리가 위협하리라는 것을, 비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듯이 직업 조종사도 눈의 징조, 안개의 징조, 무탈한 밤의 징조를 읽어낸다.
...(중략) 기계는 처음에는 조종사들을 자연의 거대한 문제에서 떼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한층 더 엄격하게 순응하도록 만든다. 폭풍우 치는 하늘이 마련해 준 광대한 법정 한복판에서 조종사는 자신의 우편기를 걸고 산과 바다, 그리고 뇌우라는 세 자연의 신을 상대로 고독한 결투를 벌이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던 이들을 찾아보고 진정 의미 있었던 시간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면 틀림없이 어떤 부도 안겨주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메르모즈 같은 친구와의 우정, 함께 겪은 시련을 통해 영원히 맺어진 동료와의 우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법이다.
사진 1번 지난 봄 대학로에서 찍은 초승달, 2번 지난 가을 덕수궁에서 찍은 달. 사진=딱정벌레 비행하던 그 밤, 그 밤 속에 빛나던 십만 개의 별들, 그 고요함, 몇 시간 동안 이어지던 그 절대적인 힘.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살 수 없다. 어려운 구간을 지난 후 나타나는 새로운 세계의 모습, 그 나무, 꽃, 여인, 미소. 새벽녘에 우리에게 막 주어진 생명으로 상큼하게 채색된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이 사소한 것들의 콘서트를 돈으로는 살 수 없다.
...(중략) 하지만 나는 결코 추락하지는 않았다. 나의 머리끝에서 발 뒤꿈치까지 땅에 매여 있었고 그렇게 내 무게를 대지에 맡기는 데 일종의 편안함마저 느껴졌다. 중력이 나에게는 사랑처럼 절대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대지가 내 허리를 받쳐주고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밤의 우주 속으로 데려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커브를 돌 때 마차에 달라붙게 하는 것과 같은 중력으로 내가 지구에 달라붙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어깨로 떠받쳐 주는 듯한 놀라운 느낌, 든든함과 안전함을 맛보았고, 내 몸뚱이 아래로 내가 탄 배의 굽은 갑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1번 지난 봄 동네에서 찍은 수퍼문, 2번 기억 안 나는 달, 3번 지난 봄 안양천에 뜬 초승달. 사진=딱정벌레실려 가고 있다는 의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힘들여 재구성되려 하는 물질들의 한숨 소리, 항구로 돌아오는 낡은 범선의 신음 소리, 역풍을 만난 범선들이 길고도 날카롭게 삐걱대는 소리 등이 땅바닥에서 올라온다 해도 놀라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툼한 대지에서는 침묵이 지속되었다. 그 중량감은 내 어깨에 조화롭게 떠받쳐져 영원히 그대로일 것만 같았다. 나는 마치 납추를 매단 채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도형수의 시체가 된 느낌이었고, 그랬기에 내겐 그곳이 마치 고국처럼 여겨졌다.
나는 내 처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위험에 처해 있는 처지를. 모래와 별 사이에서 빈 몸으로 있는 처지를. 넘치는 침묵으로 내 생명의 극점에서 이리도 멀리 떨어져 나온 처지를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비행기도 나를 찾지 못하고 내일 무어족이 나를 학살하지만 않는다면, 그 극점에 다시 닿기 위해서는 여러 날, 여러 주, 여러 달이 소요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가진 것이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단지 모래와 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숨을 쉰다는 아늑함만을 의식하고 있는 덧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사진 1~2번 지난 가을 여의도에서 찍은 초승달. 사진=딱정벌레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은 바로 앞 문장 '나는 단지 모래와 별 사이에서 길을 잃은 채 숨을 쉰다는 아늑함만을 의식하고 있는 덧없는 존재에 불과하다'이다. 이 문장을 너무 좋아해서 한때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로 쓰기도 했다. 전체 문장을 다 쓸 수 없으니 줄이고 줄여서 입력했다. 가끔 이 문장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덧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나쁘지 않았다.
일상에 지칠 때, 이 문장을 보면 마음에 위로가 됐다. 특히 하루 일과를 마칠 때 '아,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무리했구나'하고 비로소 안심하며 호흡할 수 있었다. 숨 쉰다는 것 외에 달리 다행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하루 종일 이상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재미없어도 아무 일 없는 날이 간절했다. 그런 날을 맞이하면 감사하고. 가끔 그런 시절을 어떻게든 지나온 게 신기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런 나날.
생텍쥐페리가 저 문장을 쓴 상황은 급박하고 심각한 상황이다. 덧없는 존재로 두둥 떠다니면 안 되고 빨리 구조돼야 하는 상황으로 난 이해했다. 홀로 폭풍우를 뚫고 외롭게 비행하는 조종사의 고독은 낭만적이지만도 않다.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그 상황조차 아름답게 표현해서 저 긴장감을 종종 잊곤 한다. '중력이 사랑처럼 절대적으로 내게 다가오는' 상황을 고마워하며 살아야겠다 싶다. 이런 이야기 하려던 게 아닌데 결론이 이상하군.
지난 봄 안양천에서 찍은 수퍼문. 사진=딱정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