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지식을 쉽게 풀어쓰는 작가에게 배운 것

경외심을 느낍니다

by 딱정벌레
사진=픽사베이

글쓰기에서 내게 가장 큰 어려움이자 내가 가장 추구하는 지향점. 어려운 내용 또는 전문 지식을 쉽게 풀어쓰기다. 내 글이 난이도 높은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반인에게 친숙한 내용은 아닐 수 있다만. 난 교양 수준에서 기술 콘텐츠를 쓰고 있다. 글에서 기술을 전문가 눈높이로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 잠재 고객뿐만 아니라 대중도 독자에 포함하니까. 내가 이해하는, 업계에서 주로 말하는 기술 작가는 기술 문서를 쓰는 사람이다. 그 문서는 개발자가 독자인 경우가 많고. 거기에 비해 내 글은 성격이 다르고 난이도가 낮다고 판단했다.

현실은- 난 그런 글을 쓰는 것조차 어려워한다는 거다. 난이도를 낮게 쓰기 위해 고민하는 문제가 여럿 있다. 이걸 아예 모르는 사람은 이 글을 읽으면서 뭘 궁금해할까. 여기서 이 내용이 나오면 그다음에는 뭐가 나와야 자연스러울까. 독자가 당연히 가질만한 의문을 글에서 제대로 해소한 걸까. 그 설명은 설득력이 있을까. 독자는 이 글에서 뭐가 필요할까. 이 기술이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려면 어떤 내용을 다뤄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까. 이 기술을 의미로 느끼려면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이런 내용까지 다루면 TMI 아닐까. 기술을 어느 수준으로 설명하는 게 적당할까 등. 난 이 문제가 무겁다.

글을 쓰면서 자격지심도 느낀다. 앞서 언급했듯 교양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까. 만약 전문가를 대상으로 난이도가 더 높은 글을 써야 한다면, 현재 난 과연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문과생에 개발은 해본 적도 없는 내가 할 수 있을까. 꼭 내가 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런 글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글을 쓸 줄 알아야 더 오래갈 수 있을 테니까. 지금 과정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거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건 지금껏 경험한 것보다 더 어려울 텐데 내가 견딜 수 있을지도. 기회를 잡을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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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되는 글쓰기'는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 내게 용기를 주기도 했다. 난 내가 써온 글을 유치하게 느낀 듯하다. 더 높은 난이도로 전문적인 글을 쓰는 사람에 비해 스스로를 작게 느끼고. 근데 내 글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교양 수준으로 쓰는 글도 장점이 있음을, 거기에 자긍심을 느껴도 된다는 걸 이 책에서 배웠다. 직접적으로 그런 표현을 쓴 건 아니다. 어쩌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낙하산 적용을 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전문 지식을 다룬 글을 쉽게 쓰고, 이를 삶과 맞닿게 써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걸 보며 힘을 얻었다.

"...(중략) 이처럼 과학 저자는 일상생활과 결부된 예시를 드는 데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단순히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이야기, 즉 17세기 어셔 주교의 (6000년이 채 안 되는) 성서학적 추정에서부터 인간이 실제로 달에 가서 가져온 (46억년된) 암석에 대한 포타슘-아르곤 연대 측정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나이를 둘러싼 인간 추론 능력의 놀라운 진보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각 범위에서 벗어난 영역을 다루는 학문을 대상으로 하는 범교과적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은 이러한 인문학적 접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구에 관한 연구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와 관련돼 있기를 바란다. 지구에 관한 연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왜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처럼 '왜 배우는가'를 이해할 때 더 훌륭한 글을 쓸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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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보이시주립대학교 교수진과 과학 수업에 어떻게 글쓰기를 도입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곳에 있던 지질학 교수 몬테 윌슨은 학생들에게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동시에 산문으로서도 뛰어난 글을 읽히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예시가 될만한 글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네편의 글을 보여주었다. 과연 그 글들은 과학 논문으로서나 산문 작품으로서나, 최고라 할 만했다.

...(중략)'해럴드 몰드의 보고서는('아이다호 주 스네이크 강평원을 덮친 후기 홍적세 보너빌 호 대홍수 사건과 당시 일어난 일을 재추적) 전문적 글쓰기의 탁월한 사례입니다. 전문 지질학자들을 대상으로 쓰였지만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지요. 학문적으로도 최상급이라 할 만합니다. 사실 해럴드 몰드는 이 보고서로 지형 연구(우리가 지형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죠)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에 미국지질학회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문장은 무겁고 답답한 과학 논문이 아니라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해럴드 몰드의 글은 홍적세에 일어난 사건을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 양 생생하게 묘사한다."

전문 지식이 우리 삶과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를 글에서 드러내는 게 중요함을 다시 실감했다. 이 책에서는 연구라고 표현했지만 난 이를 전문 지식으로 치환했다. 전문지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할 이유. 평소 글쓸 때 서두와 본론 1에서 이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 시점에, 이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서두에서 보여주고, 본론 1은 개념과 작동방식을 다루면서 이게 필요한 이유를 짚고 간다. 의미로 다가오는 기술 콘텐츠를 쓰는 데 이게 필수적이니까. 나만 그런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내 생각을 공감받은 듯해 읽고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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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를 대상으로 쓰면서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 그게 전문적 글쓰기의 탁월한 사례라는 말. 그러면서 학문적 가치도 높은 글. 전문 지식을 일반인도 읽을 수 있게 소화한 글을 쓰는 게. 그게 의미있는 일이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임을 이 대목에서 확인했다. 전문 지식을 잘 다룬 글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건 물론 잘 쓴 산문처럼 읽히기도 한다는 것. 글이 쉬어 보인다고, 난이도가 높지 않다고 해서 유치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고. 내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일반인이 더 잘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더 잘 써야겠다 싶었다.

"미술에 관한 글쓰기는 적어도 다음 두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독자가 그 글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림, 건축, 조각, 사진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풍경에서 마주치는 온갖 시각적 요소들을 어떻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꾸준히 미술에 관한 뛰어난 글을 생산하고 있는 작가는 '뉴욕타임스'의 미술 비평가 존 러셀이다. 적어도 나는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매일 '뉴욕타임스'를 사는 돈이 아깝지 않다고 느낀다. 그는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작가지만 결코 유식함을 과시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서 한 번도 지식을 과시하는 학자 같은 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차라리 그는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미술에 대한 열정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독자와 나누고자 하는 열혈 교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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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마지막으로 그의 문체를 살펴보자.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대단히 절제된 문장이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홀기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고른 구체적인 어휘에서 온다. 생생한 명사(창녀, 가스등), 효과적인 형용사('강렬한; 선, '놀라운' 각도), 강력한 동사(완전히 연소시키다, 선명하게 타오르다). 군더더기는 전혀 없다. 더도 덜도 아닌, 꼭 필요한 만큼의 단어만으로 쓰인 글이다.

자기 분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저자가 쓴 글은 언제나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하자. 어떤 주제의 글이든 마찬가지다. 만약 어류학자가 된다면, 나는 판화에 미친 하이엇 메이어처럼 물고기에 미친 어류학자가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 독자는 저자와 정서적으로 소통한다. 따라서 설령 전혀 관심 없는 주제일지라도 이런 저자가 쓴 글이라면 읽어보고 싶어진다. 어떤 취미에 갖는 광적인 열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삶의 에너지다."

이 부분은 미술 글을 쓰는 작가 강점이 인상깊고 이를 닮고 싶어서 발췌했다.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지 않되, 다루는 주제에 열정이 있고, 문장은 절제됐으면서 정확한 어휘를 사용하고. 글에 군더더기는 없고. 글 잘 쓰는 사람 장점을 고루 갖춘 듯. 한편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 차이는 뭘까 싶다. 열정을 드러낼 때도 유식함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경우도 있을 텐데. 의도와 상관없이. 남의 유식함을 시기해서 이를 과시한다고 여기는 건 아니었을까. 남이 행복을 자랑하는 데 인색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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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이 작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앎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넓힌 학자라면 개념을 명료하게 글로 표현하는 능력도 당연히 뛰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리더십의 시녀이기도 하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윈스턴 처칠은 힘 있는 문체가 돋보이는 글솜씨를 무기 삼아 명예로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내 이론이 항상 맞는 건 아니다. 가령 벅민스터풀러는 혁신적인 사상가였지만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뒤섞인 형편없는 글을 썼다."

"논픽션 글쓰기는 독자에게 읽기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정보나 개념, 견해를 제공해야 한다. 글을 쓰는 목적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자기만족을 위해, 심리 치료를 위해,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그 글의 유효성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개념을 글로 명료하게 표현하고 글을 잘 쓰는 게 리더십과도 연결된다'는 취지로 위 내용을 이해했다. 저자는 여기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내가 밑줄 긋고 싶은 내용은 글의 유효성을 다룬 부분이다. 글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됐느냐에 따라 유효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데. 난 이게 콘텐츠 수익화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콘텐츠로 돈 벌고 싶은 사람이 도처에 널렸다. 브런치에도 그런 목소리가 있다. 시간을 들여 글을 썼으니 거기에 따른 보상이 있으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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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글로 돈을 벌려면 그게 독자에게 의미 있는 콘텐츠고, 그들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 그래야 돈을 내고 볼만한 콘텐츠임을 인정받을 수 있을터.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창작과정에 매몰돼서 스스로 객관화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그렇다. 내가 글 쓰는 과정에서 느낀 희로애락, 특히 고통. 그런 게 크면 그게 존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 또는 그런 경험을 할 때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있을 때도 있다.

콘텐츠를 수익화한다면 누군가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러려면 그 콘텐츠가 비용을 내는 사람에게 의미 있어야 한다. 그래야 돈 내는 사람도 기꺼이 낼 테니. 또 콘텐츠를 수익화하려면 처음부터 그 콘텐츠는 유효성과 유용성을 목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수용자를 고려하고 배려하며 생산한 것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붓 가는 대로 의식의 흐름 따라 끼적이는 건 다르다고 생각한다. 후자가 수용자에게 도움돼서 유효성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경제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콘텐츠가 돈을 버는 게 타당한 듯하다.

"파브르의 작품이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어 여러 나라의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었던 건 결코 요행이 아니었다. 파브르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 알렉산더 테세이라 드 마토스는 '나는 외국어로 쉽게 옮길 수 있는지 여부가 좋은 글을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번역자를 괴롭히는 건 이른바 '독창적'이라는 핑계로 쓸데없이 꼬고 비틀어 놓은 문장이다. 반면 파브르의 문장은 언제나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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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는 어린 학생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단순하면서 흡입력 있는 문장을 구사해야 하는 과학 교육용 책을 단기간에 써내며 이런 직설적인 문체를 익혔다. 파브르에게 글쓰기는 밥벌이인 동시에 일종의 수련이었던 셈이다. 이후 오랫동안 염원해 온 진짜 자기 작품에 착수했을 때, 파브르는 이미 이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한 바 있는 글쓰기의 핵심 요소이자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재능인 '열정'을 문장에 불어넣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개성을, 놀라울 정도로 따스한 인간적인 온기와 유머를 글에 녹여냈다. 나는 한 번도 '매력'과 '곤충학자'를 연관 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곤충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모기, 말벌, 바퀴벌레 때문에라도 벌레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파브르가 곤충에 기울이는 관심엔 넘치도록 흥미가 있다. 작가와 글의 주제와의 관계는 논픽션 글쓰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중략) 하지만 작가 또한 독자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전문용어를 절제해 사용해야 한다. 지식을 과시하거나, 비전문가를 무시하려는 의도로 전문용어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앨런 교수는 자신의 논의에서 왜 이 용어가 중요한지 설명한다. ...(중략) 앨런 교수는 스포츠 담당 기자가 부러워할 만큼 생생한 필치를 자랑한다. 독자들이 그림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움직임을 전달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종류의 글쓰기에 속한다. 특히 무용 비평가는 이런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이 경우에도 구체적인 세부 묘사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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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더 많은 학자가 자신의 뛰어난 지식과 연구 성과를 기어츠나 루이스 토머스처럼 일반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의 형태로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새천년이 도래하리라는 기대는 접은 지 오래다. 학자들이 일반 출판을 위해 출판사에 보내오는 원고의 90%가 검토할 가치도 없는 수준의 글이다. 이것이 오늘날 출판 산업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들의 글쓰기 스타일은 다른 학계 인사들(학계 출입을 관리하는 문지기들)에 의해 정형화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박사 학위나 종신 교수 재직권, 동료 학자들의 인정을 받는 데 필요한 통행증과 같다."

파브르는 어릴 때 곤충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난 파브르 곤충기를 재미있게 읽지 않았지만 가정마다 한 권씩 있는 책 이미지로 기억한다. 이 책에서 비로소 그가 어떻게 좋은 작가인지, 전문적인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쓰는 사람인지 배웠다. 열정적이면서 인간미와 유머를 글에 담아낸 작가. 무엇보다도 본인이 곤충에 정말 열정적이고 애정이 크고. 이밖에 전문가가 전문성에 도취되지 말고 쉽게 글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에서 늘 일관되게 하는 이야기다. 일부 학자들의 학문 글쓰기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떤 공통점이 있다 싶고.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분야의 저술이 단지 교육적 목적만을 바라고 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과학 분야에나 그것만의 독특한 로맨스가 있다. 저자는 이러한 로맨스를 포착해 표현함으로써 그 학문의 어떤 점이 연구자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우리가 과학 저술을 읽으며 얻는 가장 큰 혜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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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내게 화학자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창이 되어 준 최고의 책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의 화학자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였다. 그때의 경험을 다룬 탁월한 저서를 세 권 쓰기도 했다. '주기율표'는 여러 해 전 미국에서 출간되어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각 장의 제목은 저자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화학원소 이름에서 떠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책은 글쓰기가 배움의 수단이라고 전제한다. 글쓰기는 이해의 수단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원동력이다. 예를 들어 다윈은 자신이 관찰한 바를 글로 기록함으로써 바다이구아나에 대한 논리적인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레이첼 카슨은 '저 깊고 어두운 바다의 신비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천착하는 글쓰기로 '햇빛이 닿지 않는 바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과학 교육이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다. 학생은 글쓰기로 문제의 해답에 접근할 수 있거, 교사는 이런 학생의 시도가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 지켜볼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볼 사례는 화학 글쓰기지만 이는 물리학, 공학, 심리학을 비롯해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실험과 관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든 학문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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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먼저 버건커뮤니티칼리지의 에스텔 마이스리히 교수는 기사의 서두에서 과학 교사가 공통적으로 갖는 의문을 거론한다. '과연 학생들에게 내용상 부실하지 않고, 문장력 또한 뛰어난 글을 쓰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이 질문의 이면에는 두가지 걱정이 숨어있다. 글쓰기 교육에 시간을 뺏기다 보면 화학 교육이 부실해질 수 있다는 것. 과학 글쓰기가 인문학 글쓰기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마이스리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8년간 내가 써온 방법을 소개하겠다. 나는 화학 전공 수업과 비전공 수업 모두에 이 방법을 도입했고, 결과는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나는 모든 시험에서 서술형 문제를 적어도 한 개, 보통은 여러 개 출제한다. 학생들에게는 답안을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작문하지 않으면 점수를 받을 수 없다고 미리 얘기해준다. 내용상으로는 바른 답이어도 문장이 형편없는 답안을 쓴 학생은 올바른 문장으로 다시 쓴 답안을 제출해야만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중략) 답안을 재작성할 수 있는 시험에서 평가 점수는 두가지로 나뉜다. 첫번째 점수는 처음에 제출한 답안에 대한 평가다. 납득할만한 수준으로 다시 작성된 답안을 기한 내에 제출할 경우 학생이 받게 될 두번째 점수는 첫번째 점수 옆에 괄호로 기재한다. ...(중략) 올바른 답을 형편없는 문장으로 쓴 답안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생들은 글쓰기에 더욱 정성을 기울인다. 그 결과 실제로 답안을 다시 써서 제출해야 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이런 식으로 하면 학생들이 문장력을 갖춘 동시에 내용도 충실한 글을 쓰도록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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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마이스리히 교수는 배움을 위한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요약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객관식 시험은 특히 수강생 수가 많은 강의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장 대중적인 지식 평가 방법이다. 하지만 학생의 이해 수준을 파악하는 더욱 완전한 방식은 그들의 설명 능력을 검증하는 것이다. 학생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글로 서술하게 함으로써 그 이해 수준의 깊이를 좀 더 정확하게 잴 수 있고, 학생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도 체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를 통한 소통은 화학 교육의 가장 직접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글쓰기를 매개로 신속한 피드백이 가능해지고, 이러한 피드백으로 학생들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를 얻는다."

서술형 시험 의미를 읽고 나니 지난번에 쓴 교육 AI 글이 떠올랐다. 교육에 AI를 적용한 사례로 챗봇을 도입한 기업을 설명했다. 거기서는 챗봇으로 학생이 질문을 받으면 이를 서술형으로 답한다. 즉, 개념을 설명하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를 자신의 언어로 설명한다. 해당 업체에서는 서술형 답안이 학생이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적합한 방식이라고 밝혔다. 그때는 소크라테스 산파술을 토대로 문답식 교육임을 강조했는데 그보다 서술형 교육 장점을 이 책을 토대로 글에 더 자세히 썼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다.

"다음은 밴오든 교수의 기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글쓰기는 사고력을 키우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개념을 글로 설명하려면 먼저 머릿속으로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글을 쓰며 머릿 속에서 정리된 개념들은 더 이상 교사나 저자의 것이 아니라 글쓴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자존감을 높이는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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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이는 (고등학생이든 성인이든,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상관없이) 종종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글쓰기 교사는 학생들이 자기 글의 가치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등식은 이렇다. '내 글을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 역시 형편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불가항력적이라 할 만큼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평가할 수 있도록 지면상에 자신의 일부를 담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망상일 뿐이다. 자기 글에 대한 비판을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글쓰기 교사는 없다. 새로 지은 욕실의 파이프 접합부가 모두 단단히 죄어 있는지 점검하는 배관공처럼, 자기 글을 자신과 냉철하게 분리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면 글쓰기는 배울 수 없다."

"글쓰기는 기술이다. 올바른 도구 사용법을 익히면 얼마든지 의도한 작업을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글쓰기와 배관은 다르지 않다. ...(중략) '겁낼 것 없다. 단지 도구 사용법을 익히는 것뿐이다. 글쓰기는 국어 교사나 글쓰기 교사만 다룰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도구가 아니다. 생각을 종이 위에 표현하는 단순한 기법일 뿐이다. 도구의 작동 방식을 배우는 즐거움을 누려라. 수학 공식을 공부할 때처럼, 컴퓨터나 원심분리기의 작동 원리를 배울 때처럼 능동형 동사의 쓰임을 익히는 즐거움을 만끽하라. 그때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복잡한 과학 개념을 논리적으로 파악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한 글로 표현해 낸다면 스스로가 노먼 메일러에 버금가는 사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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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내용이긴 한데 글쓰기가 사고력을 키우는 수단이라는 정의가 좋다. 동의하기도 하고. 업 외에 글을 쓸 때 하는 생각과 일치하기도 하다. 내 두발로 서기 위해서, 내 힘으로 생각하고 싶어서, 내 줏대를 키우고 싶어서 글을 쓰니까. 내 생각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남의 지식과 정보만 섭취하는 데서 만족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소화하는 것. 그러려면 하잘 것 없는 생각도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글쓰기는 종이 위에 펼쳐지는 사고라는 시각이 마음에 든다.

글 쓰면서 느끼는 불안감과 두려움. 내가 늘 싸우는 감정이다. 어떨 때는 거기에 압도될 때도 있다. 그게 회피 심리로 나타날 때도 있고. 그게 늘 반복되면 익숙할 때도 있지만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잘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은 필수 불가결하고 고통을 회피한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늘 직면하고 이를 잘 다스리면서 일을 계속 진척시켜야 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 잘 안될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것도 핑계일지도 모른다. 엄살 부리는 걸지도. 정말 급하고 절박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핑계 댈 생각도 안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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