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픽사베이"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인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면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이 행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설명한 '악의 평범성' 개념이다.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는 열차 이송 최고 책임자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 실무를 도맡았다. 1961년 예루살렘의 한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결백한 사람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도주해서 15년 동안 숨다가 체포됐다고 한다.
그가 재판에서 밝힌 결백 주장은 이렇다. 자신은 죄가 없고,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인 일이 없으며, 누군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자신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라고. 자신은 그저 시키는 일을 그대로 실천한 관리였을 뿐이라고. 자신은 명령을 받고 이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아이히만은 일터에서 시키는 대로 일한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보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의미나 가치를 따져보지 않고 주어진 절차와 명령에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무사유성이 악의 근원"이라고 분석했다.
영화 '더 리더'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맡은 역에서도 아이히만과 같은 악의 평범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아이히만보다 좀 더 심했다 싶기도 했다. 몰랐어요도 아니고 정당성을 주장하는 모습이랄까. 영화를 본 지 12년이 넘어서 기억이 왜곡됐을 수 있지만. 악의 평범성 개념과 아이히만 이야기는 접할 때마다 섬찟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라는 공분 때문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은 내 삶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니까. 홀로코스트 급은 아니라도, 업이 아니라도 내가 즐기고 소비하는 게 뿌리와 결과가 악한데 난 생각 없이 따라가는.
사진=픽사베이최근 읽은 책이 묘하게 악의 평범성과 많이 연결됐다. 악의 평범성 개념을 다시 곱씹은 건 '포스트 휴먼이 몰려온다'를 읽고 나서였다. 올해는 연초부터 어떤 이슈 때문에 인간다움과 기계 다움을 많이 생각했다. 연초부터 인공지능 이슈가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처음에는 오픈 AI의 새로운 이미지 생성 모델 때문에 '우아'하다가 이루다 논란을 보고 머리가 무거워졌다. 중간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기억력이 나쁘네. 덕분에 글감 정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렸다. 결국 두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로 작업하지만.
포스트 휴먼이 몰려온다를 읽은 이유는 새해부터 뜨거웠던 여러 AI 이슈 때문이었다. 그동안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 기술의 위엄을 다루는 자료만 보고 이를 알리는 콘텐츠를 주로 써왔다. 올해는 기술이 주는 편의성과 이기를 넘어 인문학 주제를 생각해볼 필요성을 여러 이슈가 제기했다. 예상대로 이루다 논란은 금방 식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과제를 남겼고 이는 꾸준히 질문하고 답을 구해야 하는 문제인 듯했다. 난 길게 보고 그 답을 만들어갈 생각이다. 여기에 도움되는 자료를 천천히 찾아보고 있다. 인간다움과 기계 다움.
그렇다 보니 기술 자체를 다룬 콘텐츠보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기술과 인간의 관계 등 철학 주제를 다룬 글을 좀 더 봐야겠다 싶었다. 포스트 휴먼이 몰려온다는 그에 부합하는 책이었다. 올해 이 책을 만난 건 행운. 새해부터 책 뽑기 운이 좋았다 싶은 게 최근 완독한 책들, 아직 읽는 책들 다 좋다.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책도 내게 의미 있고 내가 얻은 게 있으면 좋은 책이라고 보는데- 대체로 책을 읽고 난 뒤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악의 평범성 이야기하려는데 다른 소리를 하는 듯하군. 근데 다 관련돼 있다.
사진=픽사베이이야기를 돌아오면- 앞서 언급했듯 최근 읽은 책이 악의 평범성과 연결된 내용이 많았다. 그 책들이 직접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다만 편의를 추구하는 인간 욕망, 이를 뒷받침하는 인프라, 거기에 착취당하는 사람, 자연 등을 다루는데- 그걸 보면서 나를 더 생각해봤다. 한가한 고민일 수 있지만. 제대로 사는 걸까. 올바르게 소비하는 걸까. 내가 즐거움과 만족, 편의를 위해 누구를 착취하는 데 너무 무감각한 건 아닐까. 내 돈 내고 내가 이용해서 누렸으니 그걸로 끝이면 되는 걸까 등등.
별로 착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을까도. 구체적으로 고민한 내용을 말하면 이렇다. 새벽 배송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데 굳이 써야 할까. 마켓컬리 상품은 좋은데 새벽 배송 말고 다른 배송 선택지가 그 서비스에는 없는데 어찌해야 할까. 캡슐 커피는 환경에 좋지 않은데 난 캡슐 커피를 마시는 게 편하고 친환경적으로 캡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개미지옥 같은 음식 배달을 주문하는 게 긱 일자리 종사자에게 정말 도움이 되긴 한 걸까. 수익이 얼마 나오지도 않는데.
음식 배달은 굳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될 듯한데- 새벽 배송이나 캡슐 커피는 대안을 찾아보면 좋겠다. 얼마 전 다른 고객이 주문한 새벽 배송 상품이 우리 집 앞에 잘못 배달됐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면 내가 가져다주면 되는데(그전에도 그런 적 있다만)- 아예 다른 아파트라서 내가 전해주러 가기가 좀 그랬다. 택배물도 늦게 확인했고(새벽에 즉시 풀어보는 것도 아닌데 새벽 배송 이용할 필요가 있는가) 냉동식품인데 신선도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사진=메디치마켓컬리 고객센터에 문의사항을 남겼는데 답을 듣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루 지나서 결국 도로 가져가긴 했다만. 그때 남의 주문 상품이 내게 잘못 배달된 상황이 성가시긴 한데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그 고객이었다면 무척 화났겠지만. 얼마나 바빴으면 이런 일이 있을까 싶고. 마켓컬리에서 이런 일을 경험한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물량은 많고 바쁘니 경황이 없었겠구나. 새벽 배송 뛰는 사람 가운데에는 주간 배송도 하고 이 일도 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주문했다는 사실이 죄송했다. 오배송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
'뭐든 다 배달합니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를 읽으면서 그 생각을 자주 했다. 뭐든 다 배달합니다는 전직 기자가 200일동안 쿠팡 물류센터, 배민 커넥트, 카카오 대리운전 등 플랫폼 노동을 하면서 겪은 일화와 긱 일자리에 대한 그 고민을 담았다. 플랫폼 노동 실상을 여과 없이 드러내서 정보도 되고 고민도 많이 던진다. 재미있는 내용인데 이런 걸 재미로 소비해선 안될 것 같고, 재미를 느끼는 자신이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는 랩걸 저자가 쓴 책인데 환경 이야기를 다뤘다.
기자 시절 내 첫 취재는 플랫폼 노동이었다. 첫 인터뷰이는 밤마다 대리운전을 뛰는 어느 IT 회사 직원. 그때 카카오가 대리운전 플랫폼에 진출한다고 알려져서 업계 관심이 높았다. 뭐든 다 배달합니다에도 나오지만 대리운전 시장에도 문제가 많아서 기사님들은 카카오 진출로 업계가 정상화되고 자정 되길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환영하는 분위기. 나중에는 좀 달라졌지만. 그 외에 배달의 민족, 요기요, 직방, 다방 등 배달과 부동산 플랫폼 서비스를 취재하면서 식당과 부동산을 많이 다녔다.
사진=픽사베이지금은 플랫폼 노동이 일상이고, 과거에도 그게 없지는 않았지만 요즘처럼 브랜드화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배민 라이더스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일부 지역에 시범 운영했는데 그때 배민 취지가 괜찮다고 생각했다. 배민 라이더스 기사님들 처우가 괜찮다고도 하고, 배민에서도 빠른 배송 부담으로 과속하거나 위험하게 일하지 않고 안전하게 기사님들이 일하면서 좋은 처우를 받도록 보장해주려는 그런 취지가 있었다. 내 연봉보다 배민 라이더스 연봉이 더 높다고 듣기도 했고. 요즘은 잘 모르겠다만.
대리운전기사님 이야기로 돌아가면 비가 억수처럼 퍼붓던 11월 역삼역 어느 카페에서 그분을 만났다. 중간에 협회장님 도움으로 그날 바로 약속이 잡혀서 만났다. 밤낮으로 일하느라 고단하고 바쁘실 텐데 나 같은 사람을 갑자기 만나서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했다. 그분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렇게 일하면 잠은 언제 자고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의 무게도 있고 그분은 자신을 갈아 넣으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니셨다. 요즘도 대리운전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뭐든 다 배달합니다에서 대리운전 파트를 읽으면서 그때는 떠올리는데 쳇바퀴 같고 개미지옥이란 생각이 들었다. 굳이 처우를 나누자면 쿠팡 물류센터가 그나마 낫긴 하다만 노동강도가 어마 무시하다. 배민 커넥트나 대리운전을 보면 대기시간까지 포함해도 손에 쥐는 금액은 얼마 되지도 않고. 건당 정산을 받으니 공치는 날에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대기한 시간은 보상받을 수 없다. 프리랜서 일 자체가 그런 것 같다. 글은 건당 가격을 매기며, 서비스마다 다르지만 그 글로 나온 부가 수익을 나누지 않는 곳도 있고.
사진=픽사베이쿠팡에서 주문을 자주 하는 편인데 생필품을 많이 산다. 휴지, 수저, 영양제, 라면, 생리대 등. 작은 물건을 살 때도 있는데 그거 하나 내어오기 위해서 현장 관계자들이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내가 그 서비스를 이용해야 누군가에게는 일자리도 생기고 회사는 고용여력도 생기겠지만. 그게 운영되는 과정은 순탄치만 않고. 심하게는 사람이 죽는 일마저 생기니.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모호하고.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많이 이용하는 게 좋을지. 꼭 필요할 때만 이용해야겠구나. 소비자는 어떻게 이용해야 그들에게 도움될까 싶었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는 환경 이야기를 다루는데- 에너지, 먹거리 등 다양한 소재가 나왔다. 캡슐커피 이야기가 직접 언급되는 건 아니지만- 과거보다 삶의 질은 높아졌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보릿고개는 일반적이지 않은 현실인데- 자연을 착취하면서 이 풍요를 누리고 내 기분을 달래고 있으니. 요즘 들어 기후변화 책이나 관련 콘텐츠가 다시 떠오른다는 느낌을 받는데- 예전에는 먼 이야기, 입바른 소리로 취급했다면 이제는 이 문제가 현실로 와 닿는다 싶기도 하다. 빼먹을 게 많던 과거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진 듯.
사진=픽사베이악의 평범성과 결은 다를 수 있지만- 그 개념에서 내 소비행태와 삶을 돌아봤다. 소비자 후생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착취와 부조리에 둔감하기 쉽다. 내가 그랬고. 내 필요와 욕구만 챙기고 사업자 역할은 이를 충족시키면 됐다고 보고, 그 시스템을 윤리적인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지 감시하지 않고,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도 모른 척하거나 방관하면. 그것도 악의 평범성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내 필요와 욕구를 채우려다 누군가는 혹사당하고 제대로 된 보상을 못 받고 삶이 무너지는데 내 일 아니니 신경 안 쓰는 거.
소비자도 그 시스템이 돌아가는 데 책임이 있고 이해관계자이기에- 여기에 무심해선 안 된다는 걸 최근 책을 읽으면서 실감했다. 내 욕망만 충실히 채우다가 누가 부당하게 희생당하고 피해를 입는다면, 난 거기에 무지하고 관심도 없고, 주어진 내 삶을 성실히 살았을 뿐이라고 합리화한다면 그건 아이히만과 뭐가 다를까. 그 껍질을 깨고 나온다면 내 정체성은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모른다. 행복한 소비자로만 머무는 데 만족하지 말고, 소박한(?) 아이히만도 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습관을 많이 바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