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봄 경계에서

수고했다, 나 말고 올 겨울

by 딱정벌레
소국과 스피티필름(분갈이 전). 사진=딱정벌레

어제는 입춘이었고 올겨울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폭설이 내렸다. 정신없이 월말과 월초를 보내고 스파티필름을 분갈이했다. 처음으로 산 스파티필름이었는데 많이 왜소해졌다. 잎도 노랗고 줄기도 가늘어지고. 분갈이를 결심한 이유는 어느 순간 뿌리가 위에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그게 분갈이를 해야 할 신호일 수 있다고. 그걸 확인한 지 꽤 됐는데 이제야 갔다. 올 겨울에는 외출을 잘하지 않고 하더라도 일하다 잠깐 나갔다 오는 정도라 분갈이하러 갈 시간을 낼 생각을 못했다.

입춘을 핑계로 어제 분갈이하러 롯데마트 페이지 그린에 갔다. 페이지 그린에서 화분 보는 걸 좋아했다. 도심 속 정원 같은 느낌이 들게 매장도 잘 구성했고. 스파티필름을 여기서 두 번 샀는데 하나에 3000원이었다. 그 외 화분은 플라스틱을 제외하면 대체로 가격이 좀 비싼 듯했다만. 페이지 그린에 아주 오랜만에 갔는데 매장이 많이 바뀌었다. 반려동물 용품을 파는 코너가 가까이 들어섰고 오가다 매장은 없어졌다. 코로나 19를 계기로 카페가 정말 많이 어려워졌다. 문 닫는 곳이 많다. 화분을 사거나 분갈이한 뒤 여기서 차 마시면 좋았는데.

페이지 그린에서는 직원분께 일침을 들었다. 어제 화분을 들고 약 45분 걸어서 롯데마트에 갔다. 안양천 산책을 하고 싶어서 걸었는데 이게 스파티필름이 매우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따뜻한 곳에 있어야 하는데 추운 바깥을, 그것도 아무 보호장비 없이 찬바람 그대로 맞으면서 오게 했으니. "고객님은 코트 입고 목도리도 해서 덜 춥겠지만 얘는 그렇지 않다고요." 보통 차 타고 올 때도 일부러 히터를 튼다고 한다. 직원분들이 차가운 스파티필름을 어루만지며 못내 안타까워했다. 나도 미안했다. 내 반려자 아닌가.

분갈이하기 전 쓰던 화분. 사진=딱정벌레

처음에는 분갈이를 권하지는 않는 반응도 있었다. 물 조절 잘 안되면 더 안 좋을 수 있다고. 난 뿌리가 보인다고 말했고 다른 분이 화분을 봐주셨는데 분갈이하기로 했다. 더 큰 화분을 골라야 하는데 적당한 게 보이지 않았다. 어떤 건 너무 크고, 어떤 건 기존 화분과 별 차이 없고. 중간이 없었다. 어차피 더 큰 화분에 옮겨야 하니 지금으로선 과하다 싶은 크기 화분을 골랐다. 영양제도 사고. 2000원인데 10개 들었다. "괜찮아질까요?" "더 큰 곳으로 옮겼으니 살만할 거예요" 매장에서 관리법을 상세히 알려주셨다. 화분은 신문으로 덮어주시고.

오랜만에 롯데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싶었지만- 화분이 무거워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화분이 크고, 기존 화분도 같이 가져가야 하다 보니 매장에서 박스에 화분과 영양제, 기존 화분을 담아줬다. 마침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무방비에 또 노출돼선 안 되니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갔다. 양평점에서 영등포구청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라 좀 걷긴 해야 했다. 기존 화분은 이 스파티필름에게 그동안 많이 좁긴 했던 것 같았다. 화분 밑까지 뿌리가 가득 찬 흔적이 남아있었다.

문득 내 무심함으로 이 식물의 성장 잠재력을 억압한 게 아닐까 싶었다. 사람도, 식물도 잘 클 수 있도록, 잠재력을 마구 발산하도록 이끌어줘야 하는데. 내가 그 주범이 됐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저번에는 분갈이하고 나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식물은 왜소해졌고 새로 옮겨 담은 화분은 너무 커서 균형이 깨져 보였다. 혹시라도 잘 소생해서 전처럼 다시 울창해지면 그때 기념사진을 찍어보고 싶다. 내 생애 화분에 이렇게 큰돈을 투자한 건(?) 처음인 듯.

매직록 브루어리 맥주. 사진=딱정벌레

한편으로는- 이 식물은 계속 커질 텐데. 아마 나보다도 더 오래 살 수도 있는데 내가 저 식물을 감당할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더 커지면 또 분갈이해야 하고 그러면 난 수준으로 자랄지도 모른다. 어제 매장에서 듣기로는 크지 않는 식물을 찾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자꾸 크면 번거로우니까? 문득 반려동물도 크지 않는 애들을 찾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부득이할 수 있지만 내 만족(?)을 위해 생명을 거둬들이면서 내 편의를 위해 성장을 받아들이지도, 관리하지도 않으려는 마음을 어찌 봐야 할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서 화분을 놓고 다시 밖에 나왔다. 얼마 전 홈플러스에서 샀던 영국 크래프트 맥주 매직 록 브루어리 제품이 싸고 좋아서 더 사고 싶었다. 행사하는 줄 알고 급하게 갔는데 상시 가격이 저 가격인 듯했다. 330ml에 990원. 글루텐 프리 버전과 과일 버전도 같이 샀다. 매직 록 브루어리 맥주에 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었다. 지난주 홈플러스에 갔다가 우연히 봤는데 패키지 디자인이 예쁘고 싸서 그냥 샀다. 귀가해서 검색해보니 영국 맥주이긴 한데 미국 스타일이고. 되게 유명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맥덕은 좀 알고 있는 정도랄까.

이 브랜드는 브루독과 비교하면 가격이 많이 저렴한 듯했다. 브루독 캔맥주 가격은 잘 모르지만 매장에서 봤을 때 값이 좀 나가는 듯했다. 생맥주로 그걸 매장에서 마실 때는 양은 기억나지 않지만 1만원 가까이했던 것 같고. 매직록 브루어리 맥주는 종류별 이름이 따로 있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하이 와이어, 캐논볼 등. 캐논볼 하니 데미언 라이스 노래가 떠오르고. '하이(high)'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왠지 기분이 좋아서. 지난주엔 그걸 두 개 샀다. 글 털고 나서 BBQ 황금올리브치킨과 함께 치맥 하면서 곁들여 먹었다. 괜찮았다. 기분 탓인가.

베라 하프갤런, 사진 4~5번은 연말에 먹은 것. 연말을 달달하게 마무리하며. 사진=딱정벌레

지난해 12월 31일을 지나면서 아쉽지 않았던 이유는 그날은 베라 데이였고, 다음 달에도 베라 데이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난 10월부터였나. 내게 소소한 행복으로 자리 잡은 베라 데이. 며칠 먹어도 질리지 않고 쉽게 바닥나지 않는 화수분 같은 아이스크림. 늘 매장 가서 샀는데 이번에는 말일에 바빠서 배달로 주문했다. 아이스 호떡, 민트 초코칩,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 엄마는 외계인, 베리베리 스트로베리, 아몬드 봉봉을 골랐다. 배달로 받으면 편리하지만 매장에서 직원과 탁구공 주고받듯 대화하며 메뉴를 고르는 묘미를 느끼기 어렵다

2월 탁상달력 속 유배우 이미지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피 칠갑까지는 아니고 피묻은 모습이었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때 장면인데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2월에는 생일이 있는 달인데 이렇게 한달 내내 살벌한 이미지를 보려니. 3월에는 좀 더 산뜻한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라며. 하고 방금 3월 달력을 넘기고 왔는데 까만 마스크에 야구잠바 같은 걸 입은 모습이다. 연기하는 모습은 아닌 듯한데. 보고 만족스러워서 표정이 밝아져서 지금도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타이핑을 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1985년생 남자는 왜 다 저렇지.

새해가 시작되고 주말마다 작은 케이크든 뭐든 초 꽂고 불 붙이며 나만의 피정의 시간을 가졌는데. 1월 말에는 주말에 바빠서 그러지 못했다. 그날 못한 의식(?)을 어제 치렀다. 케이크가 아닌 베라 하프 갤런 아이스크림에. 사실 베라 하프 갤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다. 케이크가 아니지만 케이크로 취급한다. 케이크 대용으로 초 꽂고 불 붙이는 걸 예전부터 좋아했다. 지인 생일, 내 생일에도 그걸로 케이크 퉁치 기도 하고.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 초를 다 써서 이번에 새로운 초도 샀다. 무려 골드 메탈 초.

눈오던 날 동네, 눈오고 난 뒤, 낙산공원 풍경. 사진 1~4번은 다이아나 미니로 촬영. 사진=딱정벌레

저번에는 모든 초를 다 꽂았지만 이번에는 초 하나만 꽂았다. 디자인이 6개 모두 같은데 다 꽂지 않아도 될 듯했다. 하나씩 쓰면 좀 더 오래 쓰겠지 싶고. 불을 붙이고 임주연의 '봄이 오네'를 들었다. 지난주부터 봄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자주 듣는 곡. 그러면서 눈 내리는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봤다. 그전에는 불 붙이고 금방 껐는데 저저번 주말부턴가. 노래를 다 들을 때까지 초를 계속 켜 두고 있다. 촛불을 빨리 끄면 내 고요한 시간도 금방 끝나는 듯해서. 좀 더 오래 누리고 싶었다.

올 겨울은 눈이 참 많이 왔다. 눈이 이 정도로 많이(?) 온 건 내 기억에 4년 만인 듯. 아닐 수도 있는데. 지난겨울은 별로 춥지 않았다. 눈이 이 정도로 자주, 많이 오지 않았던 것 같고. 이번에는- 1월 들어서 매주 눈이 왔던 것 같다. 함박눈 수준으로. 눈 오는 걸 즐기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풍경을 바라보는 것 정도는 괜찮다. 덕분에 이번 겨울에 예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새해 들어 오랜만에 필름 사진을 찍으면서 눈 오는 현장을 담기도 했고. 햇빛이 많지 않고 흐렸지만 인화해보니 그럭저럭 괜찮게 찍혔다. 더 멋진 곳에서 찍으면 더 잘 나왔을까.

날도 춥고 눈도 많이 왔는데 패션업계에서 겨울 장사는 어땠을까. 겨울 옷은 두껍고 여름옷보다 비싸고. 쇼핑 성수기는 4분기고. 홈쇼핑도 패딩이나 겨울 옷 편성을 많이 하는데 언제부턴가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서 기대만큼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고 들었다. 올해는 추워도 사람들이 밖에 잘 나가지 않으니 외투를 살 필요성을 잘 못 느낄 듯도 하다. 난 지난해 잠옷 두벌 빼고 옷을 한벌도 사지 않았다. 옷이 이미 너무 많기도 하고. 주로 실내에 있으니 옷을 더 살 필요가 없었다. 신발도 안 샀고.

사진=스트라이프 프레스, 리더스북, 창비, 프런티어, 매일경제신문사, 더퀘스트

화장품도 안 샀다. 샘플 쓰고 있고, 화장을 잘 안 한다. 밖에 나가도 마스크를 쓰니까. 덕분에 피부가 전보다 많이 깨끗해졌다. 뾰루지도 가라앉고. 피부가 나아진 걸 보니 화장을 안 하고 싶다. 요즘은 안경을 주로 써서 밖에 나가도 화장을 잘하지 않는다. 안경이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커버하는 용도는 아니지만. 코받침 부분에 화장품 묻는 게 싫어서 안 하기도 하고. 화장 안 한 얼굴에 많이 적응해서. 이게 더 익숙하고 친근하다. 원래 안경 끼는 사람이었으니. 낯설 것도 없다만.

온기 우편함에 보낸 세번째 편지는 실종됐다. 익일 특급으로 보냈는데 거기서는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주소도 확인했고 선뜻 이해가지는 않기도 하지만. 큰 아쉬움은 없었다. 내 절망(?) 쓰레기통으로 그곳을 더 이용하지 말아야하고. 버려진 편지처럼 그때 내 마음도 어딘가에 버려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면 좋겠다고 바랐다. 각자 살기도 바쁜데- 짬을 내서 누군가 마음에 귀기울여주고 신중하게 말을 골라 위로를 건네는 그분들 선의를 너무 이용하지 말아야겠다고.

글을 털면서 괜한 보상심리에 책을 8권 질렀다. 책은 읽다가 좋은 내용 발견할 때도 좋지만- 사실 살 때가 가장 기분 좋고 설렌다. 이번에는 게임 '페르시아 왕자' 개발자가 쓴 책, 오픈소스 개발자 이야기를 다룬 책을 샀다. 두권 다 스트라이프 프레스에서 나온 책. 핀테크 스타트업 스트라이프에서는 출판업을 하는데 책이 많지 않지만 양서는 많다. 디자인도 예쁘고. 읽었던 책 모두 괜찮았다. High Growth Handbook이나 Get Together. 한동안 무심했던 사이 책을 많이 냈는데 위 두 책도 있었다. 가장 기대하고 있다.

사진=픽사베이

페르시아 왕자는 어릴 때 집에 플로피 디스크로 있었다. 언니들이 컴퓨터 학원에 다니면서 생겼던 건지, 누가 들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 게임을 할 무렵에는 가정에 컴퓨터가 있는 곳이 드물었다. 우리 집도 윈도 95 운영체제가 나오고 난 뒤에 컴퓨터를 샀으니까. 근데 쓸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1년을 그대로 뒀고. 내가 이모부께 컴퓨터 켜고 끄는 법을 뒤늦게 배우고 나서야 내가 그나마 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PC 통신을 이용했는데 원격으로 사람과 연결된다는 경험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흥분됐다.

그때는 유니텔을 처음 썼고 이후 천리안으로 갈아탔다. PC 통신 동호회, 팬클럽 나름 열심히 활동했는데. 천리안은 처음에 어린이 천리안으로 가입해서 불편한 게 많았다. 나중에 일반으로 바꾸긴 했다만. 동호회는 하이텔 동호회가 더 활발하고 발달한 듯했는데. 그러고 보면 그때는 PC 통신 아이디를 한글로도 만들 수 있었다. 내게 잊을 수 없는 PC 통신 기억이 있다면- 그때 젝키를 좋아했는데 팬클럽 게시판에 일부 멤버 집주소를 그대로 써서 올려서 팬들에게 쪽지로 혼났던 일이 있다. HOT 팬이 보고 오빠들 해코지 하면 어쩌냐고.

유니텔에서는 채팅하다가 변태남(?)을 본 적 있다. 두 번 봤는데 처음 봤을 때는 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이게 음탕한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바2'하고 바로 나와버렸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상대방에게 "우리 고모가 유니텔 관리자인데 널 신고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한 번만 봐달라니 어쩌니 사정사정했다. 나도 어디서 그런 거짓말과 용기가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돌아보면 처음부터 사이버 성관계를 목적으로 채팅방을 개설하는 이들이 좀 있었다. 그때는 그런 문구를 걸러낼 기술이 없었는지.

사진=픽사베이

PC 통신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펜팔도 주고받았다. 부산, 해남, 대구 등. 부산 사람인 한 언니와 친해져서 펜팔 했는데 어느 순간 소원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은 내가 다른 사람과도 펜팔을 해서 서운했다나. 너무 오래돼서 언니가 맞는지, 동갑인지 조금 헷갈린다. 해남 사람인 또 다른 언니 젝키 팬클럽에서 알았는데 따뜻하고 친근하게 대해줬다. 전화 통화도 했던 것 같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것 같은데 그런 느낌이 들지 않게 살갑게 대했다. 그러고 보니 팬클럽에서 방학 숙제도 품앗이했던 기억이. 난 독후감을 뿌렸던.

PC 통신으로 어린이 신문에 기고도 하고 소설도 아주 잠깐 쓰긴 했다. 학교에서 소년 한국일보를 받아보는데 PC 통신마다 게시판이 있었다. 난 학생에게 좀 더 자율성을 달라는 취지로 글을 써서 올렸는데 그걸 신문에 실어줬다. 경품도 보내줬다. 어린이 영어사전인데 이건 본가에 아직 있다. 신문에 글이 실렸을 때는 자랑스러움과 민망함이 교차했다. 글이 좋아서 실린 건 아니고 워낙 투고가 안 들어오거나, PC 통신 투고는 특히 없던 차에 갑자기 내 글이 들어와서 일단 실어준 것 같았다. 또 아이디가 같이 실리는데 아이디가 좀 부끄러웠다.

글을 투고했을 때는 유니텔을 이용할 때였다. 외삼촌 댁에서 외사촌 동생 1호 이름으로 아이디를 만들었다. 난 그 아이디를 같이 쓰고 있었다. 전화 모뎀으로 연결하니 이용에 따른 전화요금은 우리 집 전화요금에 합산되지만. 아무튼 신문에 외사촌 동생 이름 석자가 또렷이 박힌 아이디가 함께 실렸다. 같은 반 친구가 "아이디가 이게 뭐냐"라고 면박(?)을 줬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천리안으로 갈아탄 데에는 아이디에 주체성을 확보하고(?) 내 정체성도 웅변해보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때 천리안이 더 큰 서비스였기도 하고

카페 파스쿠찌 전경과 뱅쇼(오른쪽). 사진=딱정벌레

역시 삼천포로 빠지는 건 천재적인 듯하다. 정리하면 20여 년 전에도 PC에서 다양한 걸 했다고. 글도 투고하고, 팬클럽도 활동도 하고, 소설도 쓰고, 방학숙제도 품앗이하고, 노래도 불렀다. 집에도 컴퓨터 노래방 CD가 있긴 했는데 옛날 노래가 많았다. PC 통신에 연결해서 이용하는 노래방 서비스에는 최신곡이 많았다. 반주도 좀 더 세련된 느낌. 근데 집에서 노래하느라 밖에 사람이 와서 벨을 눌러도 문을 안 열어줘서 혼도 많이 났다. 특히 전화가 안 되거나, 전화 요금 고지서가 날아올 때는 면목없는데 멈출 수 없었다.

겨울에 꼭 하고 싶었던 게 카페에서 뱅쇼를 마시는 일이었다. 겨울에 뱅쇼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이번 겨울에는 카페에 앉아서 음료를 마실 수 없다 보니. 테이크 아웃해도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뱅쇼 키트도 파는데 그걸 사서 해볼 생각도 안 했다. 남이 만들어주는 걸 마시고 싶어. 오늘 드디어 그 소원을 성취했다. 투썸플레이스에 갔는데 안 보여서 위층 카페 파스쿠찌에 갔더니 종류가 두 가지나 있었다. 히비스커스 뱅쇼도 있지만 난 화이트 레몬으로 골랐다.

영화 '소울'을 보기 전에 짬이 나서 카페에 30분 정도 앉아있었다. 이제 해가 제법 길어졌고 하늘은 짙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비록 겨울은 끝났지만 이번 겨울 첫 뱅쇼를 2월에서야 겨우 마시다니. 왠지 감격스러웠다. 이 순간을 기념하고 싶었다. 내가 앉은자리 앞에는 큰 유리창이 있었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짙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뱅쇼를 찍었다. 인스타그램에는 사진을 세로로 길게 올릴 수 없어서 어딘가는 잘라야 했다. 결국 하늘 따로, 뱅쇼 따로 촬영했다. 난 뱅쇼 자체를 확대해서 찍고 싶었던지라 따로 찍는 게 나았다. 느낌도 좋고.

태연, 'Time Lapse'. 출처=유튜브

얼마 전 가수 태연이 'Fine'과 'Time Lapse'를 부를 때 울컥한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나도 파인은 좋아하는데 그 앨범 수록곡 가운데 좋은 곡이 많지만. '날개'라는 곡을 좋아했다. 타임 랩스는 들어보지 않았다. 어제 분갈이하러 가면서 들었는데 '어, 이거 넬 분위기 난다' 싶더니 작사, 작곡 이름에 아니다 다를까. 종완님 이름이 있었다. 공동 작곡이긴 했지만. 넬 분위기가 많이 났다. 종완님이 불러도 비슷할 듯했다. 태연이 부른 '기억을 걷는 시간'을 좋아하는데 그때부터였나. 태연 보컬과 넬 노래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 랩스도 태연 보컬과 잘 어울렸다. 나 같은 사람은 부르기 어려워 보이는데 파인도, 타임 랩스도 이별을 다룬 곡이고 누구나 살면서 겪는 일인 만큼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없다. 이별은 연인끼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하는 이별도 있다. 그 곡을 들으면서 올 겨울 첫 뱅쇼를 마시니 노래가 슬프고 공감돼 선지, 아님 이제야 뱅쇼를 마시는 이 상황이 감격스러워선지.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 보기 전까지, 영화 보고 귀가하는 길까지 계속 연달아 들었다. 종완님 소녀시대 때부터 팬이더니 성덕이 된 셈인가.

2000년대 학번에만 한정되지 않겠지만 그때 대학 다닌 사람에게 넬 음악은 많이 친숙할 듯하다. 싸이월드 배경음악으로도 많이 쓰고. 학교 밴드부도, 밴드마다 다르긴 한데 종종 불렀다. '고양이' 같은 곡은 부르기 좋은 곡인 듯. 2008년에 '기억을 걷는 시간'이 나왔는데 곡도 좋지만 어딜 가나 다들 그 노래를 틀었다. 과방에서 조별 과제하면서 품질 낮은, 과방에 대대로 내려오는 스피커로 그 음악을 들은 기억이 난다. 같은 조원인 선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자기 동기를 까면서 조 발표 수업 때마다 들이닥치는 그의 질문세례에 어떻게 방어할지 전략을 구상하던 기억도.

이촌한강공원에서 여의도 가던 길. 사진=딱정벌레

내가 좋아하는 넬 곡은- '믿어선 안될 말'이 최고인 것 같다. 언더그라운드 시절 1집에 수록됐지만 서태지 컴퍼니에 들어가고 나서 다시 앨범을 내면서 많이 편곡했다. 난 편곡 버전이 더 좋다. 언더그라운드 시절 1집은- 살 수 없기도 하고, 사려고 해도 비싸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20만원이랬고 그로부터 10년 지났을 때 30만원? 지금은 더 올랐을지도. 언더그라운드 시절 2집은 구하기 어렵지 않았는데 1집은 너무 귀했다. 넬도 그 시절 자신을 좋아해 주던 팬들끼리만 공유하고 싶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완성한 명화 그리기에 코팅을 하고 창가 옆에 뒀다. 테두리와 숫자가 적힌 부분을 덧칠했는데 아주 깔끔하게 가려지지 않아서 그냥 두고 코팅칠을 했다. 덧칠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다음 그림은 뭘 칠할지도 정했다. 상반기까지 다 정한 듯. 3월부터는 세계 도시 그림을 칠할 생각이다. 너무 많이 그려도 안 될 텐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남는 건 본가에 드리면 싫어하겠지? 중급영어회화는 이번 달에도 들으며 괜찮은 작문 교재나 강좌를 아직 더 찾아보고 있다. 독일어도. 마이 라이트 외국어 학습지는 가격은 라이트 하지 않은 느낌적 느낌.

그렇게 겨울을 마무리해가고 있다. 지난 주말엔 목표대로 이촌한강공원에서 여의도까지 걸었다. 걷는 내내 봄을 온몸으로 느꼈다. 추위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긴장을 놓치기 어렵겠지만- 이미 봄이지만. 천천히 떠나보내고 있다. 좀 빨리 갔으면 좋겠다 싶고. 겨울이 간다는 건 내가 좋아하는 해지스 니트를 입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모카썸 폴라 원피스도 입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의미한다. 스스로 해먹이기도 바빴던 겨울. 여전히 나약한 마음을 실감하며 스스로 다독이던 겨울. 더 성숙해지는 시간이 됐길.

도림천과 안양천(사진 1~6번), 우리 동네(7~8번), 낙산공원(10~12번), 항동철길(13번). 1~8번, 10~12번 다이아나 미니로 촬영. 사진=딱정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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