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개발자에게서 얻은 통찰
멜린다 게이츠, 그레이스 호퍼, 엘런 울먼
사진=픽사베이멜린다 게이츠의 '누구도 멈출 수 없다'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내용은 스타트업 시절 마이크로소프트 이야기와 기술 업계 여성 이야기였다. 가장 통찰을 얻고 동기부여를 받은 메시지는 '여성이 기술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 그는 "기술 분야는 재미있고 혁신적이며 급여도 좋다"며 "인류 미래에 더욱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며 해마다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술 분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인데 "미래 인류가 살아갈 생활방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여성이 기술 분야에 진출하지 않으면 우리는 미래에도 힘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게 멜린다의 주장이었다.
그의 생각이 허황되지 않다고 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컴퓨터 공학도 출신이고, 30여 년 전부터 MS에서 일하며 기술 분야 경력을 오랫동안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직장에 대한 관점을 형성한 데에도 MS 근무 경험이 큰 영향을 줬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하는 일을 정말 좋아"했고, "제품을 개발하는 일이 좋았고,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 좋았고, 사용자들이 스스로 알기도 전에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 좋았다"라고 회고했다. "우리는 기술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멜린다가 이 책에 쓴 표현 중 와 닿았던 것 중 또 하나는 "기술 산업 분야는 미래를 만드는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막대한 힘을 가진 곳"이라는 점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 분야에 여성 비율이 낮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런 지적은 멜린다만 한 건 아니다.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이라는 책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여성 개발자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코드와 살아가기' 저자 앨런 울먼도 20여 년을 개발자로 살았지만 남성 중심 문화가 강고한 업계 현실을 온몸으로 경험하다가 컨설턴트로 전향하기도 했다.
사진=부키난 기술 콘텐츠를 쓰는 걸 좋아하는 이유를 체계화하고 나만의 답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멜린다 생각에 도움을 많이 얻었다. 그전에 막연하게 떠다니던 생각일 뿐이었는데. 여기에 언어로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그의 주장이 통찰을 줬다. 우리 삶의 양식, 나아가 사고방식까지 바꾸는 데 기술 영향력이 지대하고 작동원리와 방식, 의의를 교양 수준에서라도 누구나 알아야 한다고. 우리 삶이 여기에 영향받는 데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에 배제되거나 목소리를 내려면 이를 전문가 리그에만 둬선 안 된다고. 미래를 만드는 권력에 무심하면 손해지. 글은 대중과 전문지식(?)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난 주변에서 여성 IT 기자를 많이 봤기 때문에 여성이 기술 콘텐츠를 쓰는 게 특별히 의미 있거나 대단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간혹 이를 덕담이나 칭찬처럼 말하는 것도 들었는데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실제 기술 분야에서 여성 비율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을 한 사람은 현업에 있고 거기에서 여성이 많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싶고. 그분의 말과 멜린다 생각을 접하면서 기술 콘텐츠를 쓰는 여성으로서 전문성을 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1987년 내가 듀크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컴퓨터 공학과 졸업자의 35%가 여성이었지만 지금은 19%다. 이런 수치 하락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개인 컴퓨터가 미국 가정에 보급되면서 남자아이용 게임 기구로 팔리는 경우가 잦고, 그렇다 보니 남자아이들이 컴퓨터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여자아이들에 비해 컴퓨터는 접하는 시간이 길다. 컴퓨터 게임 산업이 등장했을 때 상당수의 개발자들은 여성들은 관심이 없는, 자동 화기와 폭발물이 등장하는 폭력적인 전쟁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남성 게임 개발자들이 남성을 상대로 남성들만이 할 만한 게임을 만들어내는 현상이 심화되었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오른쪽). 사진=빌 앤 멜린다 게이츠재단이상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사회성이 부족하고 외부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보던 초기의 관점도 그럴. 법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워낙 널리 퍼져서 어떤 고용주는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고, '친밀한 개인적 상호 작용이 동반되는 활동'을 싫어하는 지원자를 식별하는 채용 프로세스로 활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많은 여성이 걸러졌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이 하드웨어 관련 업무에 비해 성격상 사무직에 가깝고 훨씬 수월한 업무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관리자들이 여성을 고용해 투자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 사무직 성격이 덜하고 그보다 복잡하다는 인식이 커지자 관리자들은 계속 여성을 배제하고 남성을 뽑아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해당 분야에 남성의 수가 늘어나면서 기술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여성의 기술 분야 진출이 더욱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거듭됐고 결국 소수의 여성만이 기술 분야에 진출하자 남성들이 기술 산업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진=픽사베이"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은 기술 분야 노동력 전체에서 3%, 라틴계 여성은 1%에 불과하다. 여성들은 기술 분야 노동력의 25%를 차지하며, 실제 기술 관련 일을 하는 경우는 15%에 불과하다....(중략)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미래의 생활 방식을 만들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함께 그것을 결정해야 한다."
이렇게 기술 분야에서 여성 비중이 적다고 하지만- 여성은 오래전부터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최초의 프로그래머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19세기 사람이었으며, 그레이스 호퍼는 인간이 작성한 코드를 기계 수준에 맞춰 번역하는 컴파일러를 개발했다. 프로그래밍 언어 코볼 개발을 이끌었고. 에니악을 작동시키기 위해 인간 소프트웨어로 역할한 건 6명의 여성 프로그래머들이었다. 소셜 미디어 전신인 커뮤니티 메모리가 탄생하는 데에도 여성 활약이 컸고.
여성이 기술 분야에 일익을 담당한 지 꽤 오래됐는데도 왜 이들 비중은 절반도 채 못 되는 걸까.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려면 1960년대 소프트웨어 위기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에 따르면 1967년만 해도 코스모폴리탄에서는 '컴퓨터 걸스'라는 제목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활약하는 여성 이야기를 기사로 다뤘다고 한다. "컴퓨터 걸스는... 거대하고 현란한 컴퓨터 [시대에] 이 기적 같은 기계에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치는]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한다"라고.
사진=픽사베이"코스모폴리탄에서는 여성에게 비서직 대신 프로그래밍 분야에 진출하라고 장려"하기도 했다고. "1960년대 전반에 걸쳐 여성 프로그래머가 전체 노동 인구의 30~60%를 차지한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라고 한다. 비록 "직업군의 최하위 구역에 몰렸고, 천공기 조작 같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무를 맡아 온종일 종이 카드에 구멍을 뚫었다"라고 하지만.
옛날부터 소프트웨어 위기를 향한 우려는 계속 있었는데 여성 프로그래머가 줄어든 것도 이와 관련됐다는 시각이 있다. 그 이야기에 앞서 소프트웨어 위기 자체를 이야기하면- "숙련된 프로그래머가 부족해 소프트웨어 프로젝트가 지연되고, 필요한 사양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프로그램이 버그로 가득 찼다"라고. "이로 인해 공공 분야에 심각한 실패 사례가 나왔는데 1960년대 초반 IBM에서 1년 늦게 OS/360 운영체제를 발표했고 예산을 네 배 초과"한 게 그 예다. "미 항공우주국은 단순 프로그램 오류로 캐리너 1 탐사선을 잃었고".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일은 오차 없이 수식의 정확도로 시를 쓰는 것과 같고, 전례 없는 규모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힘을 지녔다"라고.
소프트웨어 위기 원인을 분석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였다. 첫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불균형하게 발전했다"는 입장. 둘째, "프로그래머들과 이들의 예의범절을 따지는 산업 및 정부 담당자들 사이의 성격 차이 때문"이라는 입장. 셋째, "컴퓨터 산업 전반에서 높은 직책에 있는 여성 프로그래머의 감소 추세와 소프트웨어 위기가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입장. "1960년대 후반에도 컴퓨팅 분야의 여성은 남성 동료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았는데 여성 프로그래머들은 같은 일을 하는 남성이 1년에 1만1193달러를 받을 때 7763달러를 받았다"라고.
사진=픽사베이"컴퓨팅 세계는 전문화될수록 은연중에 더 남성화됐다"는 게 이 책 시각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그래밍 관련 직종에 종사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학력을 도입하면서, 독학 프로그래머들이 직장을 찾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여성들, 특히 아이를 키우기 위해 휴학했을지도 모르는 여성 지원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변화였다. 역사학자 네이선 엔스멩거에 따르면,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여성의 일로 시작했더라도, 결국엔 남성적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위기는 예상할 수 있는 결과"라는 게 저자 주장. "프로젝트가 만성적으로 지연되고 예산이 초과된 이유는 그것이 불안정한 기대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성장을 위한 초기 전제 조건을 제대로 다져놓으려면 고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현실 세계의 복잡한 문제를 실행 가능한 프로그램으로 분석하고, 비전문적인 사용자의 요구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내성적인 완벽주의자들의 세계라는 대중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래밍에는 사회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 부분에서 '잡스의 생각' 내용이 떠올랐다. 소프트웨어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주변 동료와의 활발한 소통, 사회성 중요성을 다룬 내용이 이 책에도 있었다. '세상을 연결한 여성들'에서는 사용자와의 소통, 이해를 주로 이야기한 듯하지만- 이 책 저자는 "원활한 의사소통 기술이 여성의 가치로 사회화되었다"라고 말한다. 난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프로그래밍은 섬세한 작업이고 여성이 꼭 섬세한 건 아니지만 섬세함을 갖춘 걸로 많이 간주되고 있기 때문에 여성 기질에도 잘 어울리는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레이스 호퍼. 사진=위키피디아풍부하게 조사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멜린다 책을 봐도 그렇고 여성이 기술 분야, 특히 프로그래밍 분야에서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긴 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꾼 여성들을 보면 중요한 자리보다 한직에 있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고. 남자와 비교했을 때 처우도 낮았다. 업무 난이도에 비해 처우가 좋지 않다면 직업으로서 매력이 떨어질 수도 있을 듯하고. 덜 중요한 업무에 많이 종사했다면 두각을 드러내거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을 테고. 일의 재미를 덜 느꼈을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이와 별개로 학력 제한 등을 통해 진입 문턱이 더 높아진 것도 영향을 줬을 수 있겠고.
정확한 비중과 처우는 내가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CTO나 CEO가 여성인 기술 기업도 있어서 기술 분야에서 여성이 꼭 한직에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중요한 직무를 맡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성취감을 높이며 후배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이들이 있고. 그게 오늘날 기술 분야에서 여성 비중이 다시 늘어나는 데 이바지하지 않을까. 진입 문턱은 어떤지 모르지만. 공대에 남성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은 듯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도 많으니. 꼭 개발자가 되지 않아도 온라인에 다양한 프로그래밍 교육 플랫폼이 있고 이를 통해 비개발자, 비공학도가 프로그래밍을 배워 시제품도 낼 수 있는 세상이고. 언어를 몰라도 만들 수 있고.
내용 결을 달리하자면- 앞서 언급한 기술 분야에서 활약한 여성 가운데 내가 흥미롭게 본 인물은 그레이스 호퍼였다. 유명한 분인데 난 이 책 읽고 나서야 알았다. 호퍼에게서 인상 깊었던 건 그가 일찍이 프로그래밍 민주화를 고민하고 이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작성하는 코드가 점차 까다로워지자 습관적으로 마스터 코드표에 참고사항, 코드가 짜인 문맥, 사용된 방정식을 주석으로 달아 나중에 동료들이 자신의 작업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 문서화 시스템은 프로그래머들에게 표준 관행이 되었고, 여전히 그러하다"라고. "훌륭한 코드는 언제나 문서로 남는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픽사베이지난해 말 '공부가 되는 글쓰기'를 읽으면서 수학 글쓰기, 수학 에세이 의의를 배웠다. 호퍼도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시켰다고 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접근하는 방식을 단순화하고 그 접근성의 폭을 넓히는 이런 노력은 그레이스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 아직 배서 대학의 교수였을 때, 그녀는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에 대한 에세이를 쓰게 했다. 수학의 가치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수학을 배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민간인의 세계로 돌아가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 회사에 몸담게 되었을 때도 그레이스를 계속해서 같은 관점을 유지했다. 그레이스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신생 분야에 이바지한 것 가운데 가장 길이 남을 공로는 프로그래밍의 민주화와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컴퓨터와 이야기 나누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프로그래밍 발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사람들은 고급 수학 용어, 아니 심지어 0과 1도 필요 없게 됐다. 오직 단어만 필요할 뿐.
... (중략) 그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보다 널리 알려져 비전문가들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면 판매하기도 쉽지 않겠는가. 또한 고객이 스스로 필요한 코드를 쓰고 고칠 수 있다면 그녀의 팀원들이 매번 유니박을 설치할 때마다 맞춤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도 될 터였다.
사진=픽사베이이상적인 생각이었다. 세상에는 실력 있는 프로그래머들이 매우 드물었고 그나마도 재주가 쓸데없는 일에 낭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컴퓨터의 잠재력에 눈을 뜨면서 컴퓨팅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훈련받은 프로그래머들은 부족했다. 그레이스와 그녀의 동료들은 예전처럼 팔팔한 젊은이들이 아니었다. 이 분야에는 새로운 피가 필요했고, 그렇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레이스는 그러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사용자가 일상의 언어로 컴퓨터에 명령할 수 있다.
2.그 언어는 기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즉, 소프트웨어가 프로그래머는 물론이고 사용자에게 이해될 때, 그리고 같은 소프트웨어가 IBM 기계에서와 똑같이 유니박에서도 쉽게 실행될 때 비로소 코드가 세계의 의지를 꺾기 시작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레이스는 이 개념을 '자동 프로그래밍'이라고 불렀고,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그레이스가 하버드에서 서브루틴과 코드 문서화 시스템을 연구한 논리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언제나 프로그래밍을 좀 더 쉽게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그녀가 찾아낸 지름길은 전쟁 중에는 시간과 생명을 구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비용과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었다.
...(중략) 그레이스의 전기 작가가 주목했듯이, 그레이스가 자신이 동원한 프로그래머 지원자들의 네트워크와 협력적 개발을 강조했다는 사실은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을 40년이나 앞선 것이다. 더 나아가 파란만장한 하드웨어 변천사 속에서 여전히 변함없는 공용 언어를 만든다는 것은 컴퓨팅 분야의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점이 증명될 터였다. 만약 프로그래머가 새 컴퓨터가 출시될 때마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따라잡기 놀이만 하다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자동 프로그래밍-그리고 그것의 밑바탕이 된 효율성, 접근성, 기계로부터의 독립-은 프로그래밍이 기능적 예술의 한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을 확실히 다져놓았다."
사진=Picador커뮤니티 메모리도 그렇고, 그레이스가 개발한 컴파일러나 코볼 의의도 그렇고. 과거에도 현대처럼 컴퓨터, 기술 대중화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나름대로 해결책을 모색해서 제시하시도 하고. 오늘날에도 요긴하게 쓰이는 것도 있다. 사람 생각은 대체로 비슷하구나 싶고. 우리가 진보적이라거나 진화한 사고방식이라는 건 어쩌면 단계적으로 발전하고 변화한 게 아니라 그냥 보편적인 사고방식일 수도 있다고. 그래서 과거 사람과 현대에도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거고. 다만 현대는 이를 구현하는 방식을 더 개선한 정도로 성과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프로그래밍 대중화는 코드와 살아가기와도 내용이 일부 연결되기도 한다. 코드와 살아가기는 여성 개발자가 쓴 책이지만 여성에 대한 내용이 특별히 나와있지는 않다. 그냥 개발 일반, 기술 업계 일반, 스타트업계 일반 이야기를 다룬다. 그래서 좀 더 재밌었던 것도 있지만. 여성 이야기를 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여성에 매몰되지 않고 업계 전반 이야기를 다양하게, 골고루, 폭넓게 해서 좋았으며. 그렇다보니 굳이 저자가 여성 개발자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살다 보면 "여성이 어떻게 이런 일을"하는 반응을 접하는 상황이 여럿 있다. 이런 환호나 탄성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분야가 있는데 바로 기업 정기 인사다. 예전에 출입한 모 그룹사를 예로 들면- 그곳은 항상 50대 (비교적) 젊은 임원, 여성 임원 비율이 얼마고 과거와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꼭 짚어줬다. 그걸 야마로 기사 쓰는 곳도 있고. 인사 기사를 쓸 때는 그 인사 특징도 짚어줘야 하니 많은 매체가 임원이 얼마나 더 젊어졌다느니, 여성 임원이 얼마나 더 늘었느니 '여풍당당' 이런 진부한 특징을 기사에 쓰곤 했다. 나도 그랬다.
사진=픽사베이아직 업계에 그 위치에 올라간 젊은 나이대, 여성이 별로 없다 보니 이렇게 눈에 띌 수도 있지만- IT 업계에 젊은 임원이 수두룩한 걸 생각하면 그룹사 임원에 50대면 젊은 축이라는 것, 이게 의미 있는 기용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게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고. 여성이 계열사 대표 자리에 못 올라갈 이유가 없는데 그걸 마치 회장님이 용단을 내려 시혜라도 베푼 것처럼 또는 그런 느낌이 들게 발표하는 건- 그것도 구태의연한 접근방식이다 싶었다. 앞으로 그게 별로 대단하거나 유별난 상황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세상이 변해야겠지만-
그래서 여성 개발자라고 따로 의미를 부여해서 뭔가 쓰는 것도. 그동안 별로 조명받지 못했거나, 아는 사람들만 알고 대중은 잘 모르는 사례가 많기에 이를 조명하는 건 의미 있고 필요한 일이지만. 여성이 프로그래밍한 역사 100년이 넘었는데 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을 최신 트렌드 보듯 하는 건 뒷북치는 행동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그랬으니까. 그런 반응을 보이는 나 자신이 무지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코드와 살아가기에는 여성을 키워드로 할만한 내용이 없어서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야기가 멀리 왔는데- 코드와 살아가기 저자가 말한 프로그래밍 대중화는 그레이스 호퍼 활동과 연결되는 점이 있어서 그걸 되새기고 싶었다. 기술의 대중화, 개발의 대중화, 지식의 대중화 측면에서 의의 있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공학도가 아니었지만 개발자가 됐다. 그는 "인문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코드를 짜는 폐쇄적 사회에 쳐들어가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앞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코딩을 배워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인류 상당수가 알고리즘 안에 갇혀있는 동시에, 지구에 사는 인간 중 극소수만이 컴퓨터 프로그램 실체를 아는 상황"을 언급한다.
사진=픽사베이"내 생각에 우리는 개발실 문을 열고, 그 안에 존재하는 지식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개개인이 코드를 어느 수준으로 습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코드 짜는 법을 안다고 개발자를 직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일반 대중이 컴퓨터 세계의 장막을 찢는 것이 목표다. 일반 대중이 알고리즘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코드 속에 편견이 존재하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수정하는 주체는 인간임을 이해하고 개념, 사고방식, 코드를 통해 인간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목표다."
저자는 그 방법론을 제안하고 자신이 온라인 강의로 파이썬 강의를 수강한 경험을 자세히 풀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웃겨서 육성이 터져 나왔다. 대체로 디스한 내용인데 저자는 어쩌면 좋을 수 있으니 온라인 강의를 들어보고 토론 모임을 만들라고. 필요한 걸 취하되, 강사가 편견을 이야기해도 괘념치 말고 대처법을 연습하라고 제언한다. 온라인 강의 가운데에는 내용이 불친절한 것도 있고, 편견을 전파하는 것도 있고 비전문가 입장에서 품질 좋은 학습 콘텐츠가 아니라고 저자가 판단한 것도 있었다. 이 저자에게는 재치와 해학을 배우고 싶었다. 코드와 살아가기는 주워섬길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이글에 다 포함할 수는 없어서 웃겼던 표현만 곱씹으며 마무리하려 한다.
"강의들을 찬찬히 들어보자. 영상을 앞뒤로 돌려 보다 보면 이 교수가 만화 주인공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 남자에게서 필요한 걸 취하자. 모든 편견은 당신을 후려치고 제자리에 머물게 한다. 당신의 분노를 연료 삼아 투지를 불태우자. 그런 편견을 마주하는 건 굉장히 힘들다. 하지만 이 강의 속 가해자는 화면 속 픽셀, 인터넷을 타고 오는 데이터일 뿐이다. 웹이 이렇게 유용하다! 영상을 잠시 멈추고 그의 눈을 손가락으로 찌르자. 그를 향해 메롱도 해보자. 그는 당신을 볼 수 없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대처법을 연습하자. 편견을 똑바로 보면서 움츠러들지 않는 어려운 기술을 배울 기회다. 당신의 존엄성, 당신의 분노한 존엄성을 지켜나갈 방법도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