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뮤지컬 '더 픽션'을 봤다. '전설의 리틀 농구단' 이후, 뮤지컬을 보는 건 약 9달 만인 듯. 유승현 배우가 더 픽션에 와이트 히스만 역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척 고대했다. '배니싱'을 보고 싶었지만 표를 구할 수 없었고, 지난겨울 코로나 19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공연은 꿈도 못 꿨다. 뮤지컬도 거리두기 좌석으로 인해 자리가 얼마 없었고. 배니싱은 그 시기에 했던 여러 공연 가운데 인기 공연이었던지라. 상황이 완화되고 뮤지컬 공연 티켓을 구하는 것도 전보다 덜 어려워졌다. 더 픽션도 자리가 많았다.
더 픽션은 창작 뮤지컬인데 이번에 3연이라고 들었다. 작년에는 공연이 없었고. 유 배우는 처음부터 계속 와이트 히스만 역으로 출연해왔다. 이번에는 정동화 배우(그레이 헌트 역)도 오랜만에 봤다. 지난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에서 본 이후로 처음인데- 뮤지컬 배우를 잘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배우가 동시에 출연하는 작품을 봐서 더 기대되기도 했다. 지난 9개월 동안 달력과 SNS, 라이브로만 접한 유 배우를 드디어 오랜만에 공연에서 본다니. 가기 전에 집에서 짬뽕과 칠리 새우를 해 먹고 오래간만에 화장하면서 들떠 있었다.
정 배우는 정말. 팔색조 매력을 갖췄다. 솜에서 본 천진난만한 이미지의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레이 헌트에 정말 녹아 있었다. 아니, 그레이 헌트 그 자체. 작품을 많이 보지 않아서 더 인상 깊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가 출연하는 다른 작품도 더 보고 싶기도. 유 배우야 뭐, 말할 것도 없다. 더 픽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안경 낀 미남 이미지로 나왔는데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이반 때처럼 '냉'미남 느낌은 아니었고. 작가님을 친애하는 그냥 미남 기자. 나중에는 광기도 엿보였지만- 고함치는 장면에서 '와!'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더픽션 출연진. 사진=딱정벌레
더 픽션은 1932년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정 배우가 연기한 그레이 헌트는 작가인데 한 신문에 '그림자 없는 남자'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다(언론과 문학은 밀접한 관계임을 이런 데서 다시 실감, 원래 신문이 문단 등용문이었지). 유 배우가 연기한 와이트 히스만은 기자인데 그레이 헌트 작품의 편집자로 역할하고 있다. 글을 읽고 피드백하며 자기가 다니는 신문사에 실리도록 전달하는 이. '그림자 없는 남자'에서는 '블랙'이라는 인물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게 현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면서 논란이 됐다.
그레이 헌트는 자신이 쓴 소설이 살인 발단이 됐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살인 고리를 끊기 위해 연재소설 마지막 회를 블랙이 자신(헌트)을 죽이는 내용으로 마무리지으려 했고. 와이트 히스만은 (내가 봤을 때) 변태 같은 인물인데- 그레이 헌트를 작가로서 애정하고 존경하며 더 좋은 작품을 쓰도록 이런저런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림자 없는 남자'가 독자에게 인기를 끌 수 있도록 소설 내용을 자극적으로 구성하는 데에도 그의 역할이 컸다. 덕분에 이 작품은 흥행했고 소설 속 살인이 현실에서도 일어나면서 더 큰 화제몰이를 했다.
작품 속 와이트 히스만은 이런 논란 속에서도 광란의(?) 질주를 이어가려는 모습이었다(내가 이해하기에는). 그러나 그레이 헌트는 현실에서 재현된 소설 속 살인, 평론가들의 혹평에 무척 괴로워했고. 작품 연재를 포기하고 싶어 했다. 와이트 히스만은 작품을 연재하는 동안 그레이 헌트와 한 곳을 바라보며 함께 달려온 동지였지만- 작품이 흥행하고 있는데 작가가 펜을 꺾겠다고 하니 온갖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 작품을 보면서 압권(?)이라고 느낀 장면이 바로 그가 그레이 헌트에게 마구 쏘아붙이는 장면이었다("와, 배우다, 배우!").
더픽션 포토존. 사진=딱정벌레
내용을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는데- 현실에서 재현된 블랙 살인은 사실 조작이었고 거기에는 와이트 히스만이 관련돼 있었다. 그가 굳이 이런 조작을 벌인 이유는- 여기서 다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그게 중요한 부분인데 난 사실 설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다고 저런 짓을 저질러?', '그런 이유가 합당하고 생각해?' 이런 생각이 들었던지라. 그러나 애초에 그가 어릴 적 트라우마를 안고 있고, 그레이 헌트라는 작가를 무척 애정하는 똑똑하고 인간적인 '또라이'임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법했다. 정상이 아니면 저럴 수 있지.
그래도 이 작품에 여운이 남았던 이유는- 결국 '글 이야기'였기 때문인 듯하다. 돌아보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도 그렇고,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도 그렇고 등장인물 가운데 작가가 있었으며, 그렇다 보니 꼭 글 이야기가 나왔다. 더 픽션도 마찬가지(제목이 이미 픽션인데, 뭐). 각 작품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와 닿는 내용이나 대사가 있는데. 더 픽션에서는 이런 대사들이 기억에 남았다. 첫 번째는 이거. "누군가에게는 한 편의 소설이지만 우리에게는 삶이니까(그레이 헌트)".
뒤에 언급할 대사와도 연결되는 내용이지만- 난 이 대사가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은 누군가에게 문자 그 자체로만 남을 수 있지만. 그걸 쓰는 사람에게는 삶과도 같다. 헌트가 말한 맥락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 주제, 내용, 구체적 표현까지 그 글에 들어가는 모든 구성요소를 고민하고 한 자 한 자 수놓는 과정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생활이고, 일상이며, 인생이다. 그 문자에는 남지 않겠지만 그걸 쓰는 과정이 그 작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픽션 티켓. 사진=딱정벌레
그게 인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삶의 일부이고, 그 일부에 쓰이는 시간은 귀하다. 그 과정에서 기울이는 노력도 소중하고. 문제는 그게 자기 객관화를 어렵게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내가 고생해서 정성 들여 썼다 한들 독자에게 와 닿지 않으면 그건 그냥 전파 낭비, 종이 낭비일 뿐이고, 쓰레기 취급받을 수 있다. 그걸 쓴 사람도. 그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 건 내 사정일 뿐이지 남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무시나 외면은 기본으로 감수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걸 무던하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글쓴이에게는 글이 삶이라서 그런 듯.
한편으로 그 대사는 왠지 모르게 위로도 됐는데- 내가 고민한 문제 중 하나가 '내 글에 애착이 너무 강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기 객관화가 안 되고, 뒤틀리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나한테는 내 글이 내 새끼이고, 누군가 그걸 활용하면서 제대로 존중하지 않으면 거기에 항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스스로 감정을 너무 소모하는 일이다. 감정을 소모하는 나, 지랄하는 나에게 자괴감이 들 때가 있었고- 내가 싫어지는데 그렇게 발광한 이유는 그게 내 삶이고, 이야기여서 그랬나 보다 싶었다.
작품에서 그레이 헌트가 자기 작품 속 살인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평론가들에게 혹평받는 상황을 못 견뎌한 것도- 죄책감도 있겠지만 그 소설을 쓰기 위해 고심하고 노력했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소설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겠다 싶다. 글 쓰는 건 헌트이지만 그 작품에 피드백을 하고, 때때로 아이디어를 건넨 와이트 히스만에게도 그 소설은 자신의 삶이었을 테고. 그 소설이 완성돼서 세상을 빛을 보기까지 그도 큰 힘을 보탰으니까. 그 소설에 누구보다 애착을 가졌으니까. 애착과 집착을 오가는 느낌이지만. 삶이라서 그런지도.
사진=픽사베이
그게 이 작품에서 전달하려는 메시지인지 모르겠지만- 수용자 입장에서는 제 논에 물대기식 해석을 배제할 수 없다 보니- 난 그렇게 이해했다. 결국 그 작품으로 날 돌아보다 보니. 내가 위로받는다고 느꼈던 지점은- 등장인물도 제정신 아니고, 나도 좀 그런데 그게 옳다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맥락은 있다는 거. 문제는 그걸 어떻게 다스리며 사느냐인데. 이럴 때 항상 떠오르는 말이 있다. "Don't be evil". 한때 구글의 행동강령이었던 이 말. 어디 구글만 그렇겠나.
살다 보면 늘 인간과 괴물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말로 내뱉을 수 없고, 행동으로 저지를 수 없는 죄된 생각을 마음껏 욕망한다. 내가 머릿속에 늘어놓는 생각을 모두 행동으로 구현하면 나도 사회에서 격리돼야 할 사람이다. 그나마 사람이라고, 사회 한 구성원이라는 의식 때문에 자물쇠 잠그듯 내 죄된 생각을 묶어놓는다. 와이트 히스만이 저지른 행동을 보니 영화 '나이트 크롤러'에서 제이크 질렌한 모습도 떠올랐다. 특종을 만들기 위해 함정을 열심히 파던 미친 자. 음원 스트리밍 횟수 조작이나 오디션 프로그램 조작과 비슷한가.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간 느낌인데- 내가 내 서사에 너무 취해서 규칙이나 원칙을 무시하고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르는 게 정당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 이유로 그런 행동을 합리화해서도 안 되고. 내 삶이고 이야기라는 이유에서 냉정하기 어렵겠지만 그럴수록 더 냉정하게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자기 연민이 심해져서 남을 괴롭히고 범죄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고. 살면서 어려운 것 투성이지만 그중에서도 경계를 지키며 사는 게 정말 어렵구나 싶다. 자신에게 냉정 해지는 것도. 남에게 관대한 것도.
사진=픽사베이
더 픽션은 마지막 대사도 여운이 강했다. 와이트 히스만 대사인데- 앞서 언급했던 그레이 헌트 대사 연장선상에 있다 싶다. 아울러 이 대사는 우리 삶을 아우르는 메시지란 생각도 들었다. 저마다 하나의 이야기로 남고 싶은 욕망. "현실의 삶이란 때때론 한 편의 소설보다 소설 같으며, 한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다. 그리고 우린 모두 누군가에게 하나의 이야기로 남길 원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간직하고 싶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더 픽션, 완결."
가끔 내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길 바라고, 누군가에게는 의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브런치에도 그런 글을 종종 썼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내가 '하나의 이야기로 남길' 원하는 마음과 연결됐다 싶다. 누군가에게는 내 이야기가 의미 있는 서사였으면 좋겠고. (내가 의미 있게 여기는) 단 한 사람이라도 이에 귀를 기울여주면 고맙겠다고. 근데 그건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당장 가족이 내겐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 외 사람들은 남일뿐이고,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저런 바람을 품을 것도 없다. 그들 의무도 아니고.
가족이 됐든, 누가 됐든- 의미로 남고 이야기로 남는데. 어떤 이야기로 남을 것인가는 늘 염두해야 할 일인 듯하다. 그건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내 삶을 어떻게 그려가야 할지와 관련된 문제다 보니 삶의 지향점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이야기가 한 가지일 수만 없고, 좋은 이야기만 있을 수도 없겠지만- 최대한 좋은 이야기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난 뭘 하고 있나. 무엇에 가치를 두고, 신경 쓰면서 살고 있나. 어쩌다 아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더라도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나. 더 픽션 대사를 곱씹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