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예찬

세미원, 창경궁, 후원 이야기

by 딱정벌레
세미원. 사진=딱정벌레

살면서 올해만큼 봄을 한껏 만끽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매년 정해진 시기에 꽃이 피고 지지만- 올봄에는 예년보다 정원을 자주 다닌 덕분에 봄을 플러스 알파로 누리는 기분이다. 초여름 더위가 일찍 찾아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십수 년 전에도 4월 말은 좀 더웠던 걸로 기억해서 요즘 기후가 낯설지만 않다. 그래, 올해는 정원을 많이 다니고 있다. 그래 봐야 세 번 정도지만(1월에 갔던 남산 수목원은 제외한다)- 3~4월에 주로 다녔다. 창덕궁 후원, 창경궁, 세미원까지. 눈앞에 평소에 못 보던 풍경이 펼쳐져서 설레기도 하고.

신록이 잔뜩 우거진 정원을 보면 눈이 참 즐겁다. 기분도 전환되고. 제대로 쉬는 느낌. 정원이라고 하지만 나무가 무성한 숲에 더 가까운데- 도시에 있으면 이런 공간이 더없이 간절하다. 울산 십리대 대나무 숲이나 월정사 전나무숲 같은 곳에 가면 좋지만 거리가 멀다. 서울 시내나 근교에서 갈만한 곳이 생각보다 많다. 특히 고궁은 예로부터 이어져 오는 정원이 있고, 궁중에서 운영한 정원이다 보니 고급스럽고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시민이면 누구나 1000~5000원을 내고 정원을 구경할 수 있고.

역순으로 올봄에 방문했던 정원을 짚어보고자 한다. 지난 주말에 양평 세미원에 다녀왔다. 세미원에 간 건 정원을 보겠다기보다 그냥 양평에 가고 싶다는 이유가 컸다. 작년 가을부터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서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두 계절이 지나고 봄에 이르렀는데 요즘이 딱 가기 좋은 시기다 싶었다. 날이 너무 좋으니까. 양평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슛뚜님 브이로그 영향이 컸다. 양평군과 광고 콘텐츠로 만든 건데- 영상이 너무 좋았고 슛뚜님이 다녀온 코스에 마음이 동했다.

슛뚜님 양평 여행 브이로그. 출처=유튜브

전에도 양평에 가본 적이 있긴 했다. 수습기자 시절 한국 언론진흥재단에서 운영하는 교육을 듣고 있었는데- 마지막 주 3일 동안 양평 코바코 연수원에서 합숙을 했다. 언론재단 수습기자 교육은 기자들 사이에서 '복지' 같은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 기간에도 마와리를 돌리는 회사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 기간에 교육만 받도록 해줘서 평소보다 여유로웠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삶의 행복지수가 쭉쭉 올라가고 거길 다녀온 뒤에는 쭉쭉 내려간다고 들었다. 정말 그랬고. 국과수에 부검을 견학하러 가고, 드론 촬영도 하고. 물론 과제는 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교육받을 기회가 생각보다 많지 않고 기간도 무척 짧다. 그나마 교육다운 교육을 받는 시기가 수습 시절 언론재단 교육을 받는 이때다. 언론재단에서 그 이후에도 기자를 대상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는 한다. 한국기자협회나 삼성 언론재단 등 여러 기관에서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좋은 프로그램도 많다. 문제는 다들 바빠서 그걸 챙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매달 1만원씩 회비 내는 보람이 여기에 있는데- 교육 효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교육받으러 가면 소중한 기회니 잘 들으라는 당부를 듣는다.

합숙을 갔을 때는 다이내믹한 일이 있었다. 합숙은 평온한 양평 분위기와 이질적인 기억. '교육 끝나고 난 뒤, 회사로 돌아가면 어찌해야 하나', '부서 배치도 받을 텐데' 이런저런 고민이 많이 들었다. 수습 시절부터 늘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지라. 교육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갔고. 연수원 주변을 혼자 산책하면서 잡생각을 많이 했다. 합숙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어떤 카페에 들렀는데 교육 동기들과 핸드폰을 바꿔보며 단말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눴다. 거기서도 단말기 이야기를 많이 했네.

세미원. 사진=딱정벌레

아무튼 양평은 구경거리가 많은 곳인데- 난 이런 기억밖에 없고, 슛뚜님 영상을 보니 좋은 곳이 많길래 여유롭게 다녀오고 싶었다. 그러나 거리가 멀고(솔직히 이 거리, 이 시간이면 대구 정도는 가뿐히 다녀올 수 있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 여기 가려면 굳은 의지가 필요했다. 주일 오후에 예배 끝나고 최대한 마파람에 게눈 감추는 속도로 다녀왔다. 토요일에는 다른 볼일이 있었던 터라. 물소리길까지 가기는 어렵고 영상에서 숲길이 멋져 보였던 터라 그 숲길이 있는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가보기로 했다.

중앙선을 타고 양수역까지 갔다. 서빙고역에서 전철을 탔는데 1시간 좀 넘게 걸린 듯하다. 전철 안에서 '팬덤 경제학'을 읽었는데 팬픽 이야기가 나왔고 내용이 흥미로웠다. 콘텐츠 창작자와 팬이 팬픽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 나왔는데 작년에 BBC 라디오에서 해리 포터 작가 조앤 K. 롤링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던 게 떠오르고- 중앙선은 창밖 너머 전경이 좋았다. 서울에서는 강변북로를 따라 선로가 펼쳐져서 한강을 볼 수 있고, 서울을 벗어나면 시골 풍경이 등장해서 괜히 설레기도 하다.

양수역 주변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역 주변에도 자전거 관련 매장이 많았다. 세미원은 양수역에서 걸어서 13분 거리였다. 운영 시간은 오후 6시까지인데 이미 늦은 오후에 간 터라 관람 시간이 빠듯했다. 4시 반 넘어서 도착했으니까. "빨리 보고 나오겠다"라고 말하고 들어갔다. 여기는 입장료가 있다. 무려 5000원. 창덕궁 후원도 입장료가 5000원이다. 세미원에 들어가니 3층 높이 한 건물이 있었는데 외관 디자인이 독특했다. 여기에 카페도 있고. 슛뚜님 영상에서 카페가 나오는데 난 거기 갈 시간은 안됐다. 크로플 안녕.

세미원. 사진=딱정벌레

문을 통과하니 담장 너무 짙은 분홍색 복사꽃이 피어있었다. 바로 옆에는 슛뚜님 영상에서 내가 꽂혔던 나무 숲길이 펼쳐져 있었다. 아래는 실개천이 흐르고 징검다리가 있었고. 신록이 잔뜩 우거진 모습을 보니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정원이라 해도 꽃도 필요 없고 난 여기만으로도 충분했다. 시간만 있으면 벤치에 앉아서 책도 읽고 오래 시간을 죽여도 좋겠다 싶었다. 서둘러 숲길을 촬영했다. 나무가 크고 길었다. 광각 모드를 설정해서 카메라에 숲길 위아래 모습을 최대한 담았다. 음악도 끄고 이어폰도 뺐다. 물 흐르는 소리 들으려고.

징검다리에 발을 조심스레 내디뎠다. 시간이 빠듯했지만 이 숲을 최대한 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길은 길지 않아서 빠져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징검다리를 다 건넌 뒤에는 뒤돌아서서 내가 걸었던 길을 다시 둘러보기도 하고. 세미원에는 철쭉이 한창 피었고, 튤립도 있고, 분수도 있고, 여러 콘셉트로 다양한 정원을 꾸몄지만- 이 숲길이 최고였다. 꽃은 생각만큼 다양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꽃 보러 온 건 아니었으니. 문득 여름에 오면 볼거리가 다양하지 않을까 싶고. 물은 좀 더러웠다. 사진에는 그리 티 나지 않는 듯.

정원 주변을 걷다가 후문으로 빠져나와서 두물머리로 갔다. 세미원에서는 입장권이 있으면 두물머리로 나갔다가 여기에 재입장할 수 있게 해 줬다.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인데- 이모 해석을 들으니 이름이 참 시적이다 싶었다. 두 물(강)이 만나는 곳이라서 두물머리인가. 휴일이라서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에는 그림 그려주는 사람도 있고, 먹거리를 파는 가게도 많아서 흡사 유원지 풍경이었다. 나중에 보니까 여기서는 핫도그를 많이 사 먹는 모양인데 못 먹어서 아쉽다.

세미원. 사진=딱정벌레

양평까지 가서 편의점 아이스커피만 마시고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다. 시장이 열렸더라면 다양하게 먹어봤을 텐데. 수수부꾸미나 냉면이나. 카페라도 괜찮은 곳에 갈까 했는데- 줄은 길고 일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 그냥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사마셨다. 갈증이 났는데 물 말고 아아가 당겼다. 일요일도 좀 더웠기도 하고. 두물머리 강물은 고요했고 평온한 분위기였다. 평일에 사람이 없을 때 오면 더 여유를 누릴 수 있을 듯. 그러고 보니 화분도 이 주변에서 많이 팔았다. 두물머리까지 둘러보고 6시에 세미원을 빠져나왔다. 소원 성취. 미션 완료.

일상 나부랭이를 쓰고 있는데 벌써 10 문단이 넘었다니. 이러니까 브런치에 글 쓰는 게 힘이 부치지. 지금 밖에서 빗소리가 난다. 밤에는 항상 블라인드를 내리는데 올리고 싶고. 갑자기 후덥 지끈하다. 난 오늘 낮에 비가 올 줄 알았는데 이제야 내리다니. 양평에 머문 시간은 양평에 가는 데 걸린 시간과 비슷한 듯했다. 역 주변 안내판을 보니 황순원 문학촌도 여기에 있던데- 거기는 정말 멀었다. 양평 안에서 이동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듯. 물소리길은 다음에 와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시장에 가서 수수부꾸미도 먹고, 냉면도 먹고.

이달 초에는 창경궁에 갔다. 창경궁=정원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고궁은 워낙 조경이 잘돼 있기도 하고. 아픈 역사이긴 한데 창경궁은 오랫동안 식물원, 동물원 등 유원지 기능을 해오기도 했다. 일제가 연못을 만들고 그 유명한 대온실을 여기에 지었다. 대온실은 지금도 창경궁에 남아있는데 등록문화재다. 창경궁 포토스폿 중 하나. 사실 대온실에 가고 싶어서 창경궁에 갔다. 그전에도 창경궁에 가보기는 했지만 대체 뭘 구경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대온실은 정작 가지도 않았던 것 같고.

창경궁 대온실. 사진=딱정벌레

아쉽게도 대온실은 코로나 19 때문에 입장할 수 없었다. 밖에서 구경만 가능했다. 그래도 유리 온실이고 창문이 열려 있어서 밖에서 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긴 했다. 카메라를 창 가까이 들이대면 마치 실제 안에 들어온 것처럼 내부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또 온실 외관이 예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사진을 찍는다. 감염병 위험지대인 듯. 창덕궁 홍매화 나무와 더불어? 나도 갔으면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대온실 앞에는 정원이 있는데 대기업에서 같이 이 정원을 관리하는 듯했다. 분수도 있고.

창덕궁도, 창경궁도 근현대적인 요소를 많이 갖췄다. 인정전에 전등과 커튼이 있다거나. 서양식 의자나 침대가 있다거나. 대온실도 서양식 건축 양식이고. 왕가가 이 씨라서 이를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을 용마루에 가득 장식했다. 예뻤다. 아, 오얏꽃이 이렇게 예쁜 꽃이었구나. 대온실 안에는 어떤 식물이 있는지 일일이 다 알 수 없었지만- 크고 작은 녹색 식물이 유리 온실을 채운 것만으로 보기 시원하고 좋았다. 수목원에 온 기분? 대온실 유래는 여러 설이 있는데 순종을 위로하기 위해서란 말도 있고- '병 주고 약주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창경궁에 입장해서 대온실로 이동하는 길도 정원 그 자체였다. 나무가 무척 많고 역사가 오래됐으며 독특한 나무가 많았다. 흰 소나무가 있는데- 중국에 간 사신들이 현지에서 솔방울을 가져와서 심은 게 저 백송이라고 한다. 300년 된 느티나무도 있고. 철쭉도 처음 보는 색이 있고. 일제가 만든 연못은 좀 그랬지만 시민의 휴식처가 됐다. 창경궁에는 궁의 여인들이 많이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래선지 아기자기하고 조경도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창덕궁 부속 궁궐이기도 해서 볼 게 없다고 예전에는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창경궁. 사진=딱정벌레

창경궁도 창덕궁만큼이나 장소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많았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흉물을 파놓은 곳도 여기에 있고, 사약을 받은 장소도 여기에 있다. 정조가 책을 읽고 세상을 떠난 곳도 여기에 있고. 순조가 태어나서 돌잔치를 한 곳도 여기에 있고. 숭문당에는 영조 친필로 남긴 현판이 걸려 있고. 명정전은 정전 치고 작지만 그래도 조선시대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국보이기도 하고. 창덕궁 인정전을 보다 이걸 보면 시시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역사적 가치는 상당한 곳.

보물도 많다. 당장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이 그렇고, 옥천교까지. 그 외에도 보물이 여러 가지 더 있는데 다 훑어보고 안내문을 읽어보니 볼거리가 참 많은 곳이 창경궁이었다. 예전에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이해가 부족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과거에는 눈에 잘 띄지 않던 게 이제 와서 특별해 보이고. 몰랐던 가치에 새로 눈을 뜨는 것만으로 잘됐다 싶다. 창경궁은 대온실도 있고 조경도 아름다우니. 근처 직장인들이 여기에 많이 산책하러 온다던데- 서울 중심은 다르다 싶고.(갑자기 어떤 커뮤니티에서 '서울 중심이 종로냐, 강남이냐' 두고 토론이 벌어진 게 생각난다. 비등비등했는데 '종로는 대한민국 중심'이란 말이 와 닿았다.)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는 거다. 거기에도 매표소를 두고 검표를 하는데- 오후 5시까지만 문을 열어놓는다. 창경궁이 창덕궁 부속 궁궐이고, 후원을 서로 같이 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모습이긴 하겠다만. 창덕궁 후원은 한 달 여 전에 다녀왔다. 후원에 가고 싶어서 3월에만 창덕궁을 두 번 갔는데- 후원 표는 예매해야 하고, 부지런을 떨어야(?) 표를 구할 수 있다. 표 수가 제한돼 있으니까? 예전에도 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창덕궁 후원. 사진=딱정벌레

후원은- 3월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꽃은 많았다. 창덕궁 자체는 꽃이 많이 피어 있었는데 후원은- 나무도 소나무를 제외하면 아직 겨울철 앙상한 가지 그대로인 곳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시시하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그 넓은 정원을 종횡무진하고, 군데군데 연못과 정자를 구경하면서 '아, 이게 왕실의 정원이구나'라는 게 새삼 실감 났다. 에든버러 홀리루드 궁전에 갔을 때도 정원을 구경하긴 했다만- 거긴 작은 궁전이라서 그런지 정원도 아담했던 것 같다. 전형적인 서양식 정원?

동양의 정원, 조선 왕실 정원은 규모가 남달랐다. 창덕궁이 정말 큰 궁궐임을 온몸으로 느꼈다. 경복궁도 너무 옛날에 가서 별 기억이 없는데 거긴 여기보다 더 크려나? 아무튼 창덕궁 후원은 굉장했다. 부용정 주변에 규장각도 있고, 정자도 있고, 연못도 있는데-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후원은 인원 수도 제한되기 때문에 들어가도 사람이 별로 없어서 내가 전세 낸 기분으로 정원을 실컷 즐길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지키면서 쾌적한 관람이 가능하다.

여담인데 제페토에서 부용정을 그대로 재현한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디테일을 잘 살렸길래 고궁도 메타버스로 고증 잘해서 구현하면 또 다른 재미가 있겠다 싶고. 우리는 지금 공항에 가기 어렵지만 제페토 공항은 한껏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고 한다. 가상으로 여행 기분을 낸다고 해야 하나. 후원은 표를 빨리 못 구하면 들어가기 어려우니 온라인으로라도 실감 나게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으면 좋겠다 싶다. 구글 아트 앤 뮤지엄 앱에서도 가상현실로 세계 박물관 전시를 볼 수 있긴 하다만.

창덕궁 후원. 사진=딱정벌레

후원은 왕실 정원이고 규모가 거대하지만 화려하기보다 소박하고 정제된 멋이 있다. 가옥이 많은데 왕실 건물보다 사대부 집안 가옥 느낌이 난다. 여기서 연회도 열고, 정자에서 책도 읽고, 사냥도 했다고. 이런 데서 공부하면 집중이 잘 되겠다. 정원이 넓은 데다 건물은 적당히 있어서 여백 미도 느껴지고. 연못도 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물이 흐르고, 나무도 많고.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 선릉에서 산책하곤 했는데 거기도 숲이 있고 나무가 우거져 있지만 무덤이라서 좀 그런데. 후원은 너무 좋아서 발걸음 떼기가 아쉬웠다.

표현력이 부족하다 보니 후원에서 느낀 감흥을 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일 생각은 없고. 내 어쭙잖은 표현이 후원의 멋을 반감시키지 않길 바랄 뿐. 이날은 필름 카메라도 들고 갔는데 새로 산 후지 필름을 넣고 한통을 다 썼다. 다행히 사진이 그럭저럭 괜찮게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5000원짜리 필름 스캔을 해서 그런가. 해상도가 나쁘지 않았다. 이날 노란 장미와 흰 소국을 사서 돌아왔는데 사진도 예쁘게 잘 나왔다. 후원은 5월 이후에 잎이 많이 자랐을 때 가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이아나 미니에 후지 수퍼리아 iso 400 필름 넣고 찍은 창덕궁 후원. 사진=딱정벌레

자연에 잠시나마 묻혀있다 나오면 힘도 얻고 기분도 한결 낫다. 고궁은 역사의 현장이다 보니 가서 배우는 것도 많고. 익숙했던 걸 낯설게 보면서 새롭게 깨닫는 것도 있고. 정서도 한껏 고양되는 기분. 그 에너지로 다음 일상을 힘차게 살아야겠다 싶고. 또 무너지고. 넘어지고. 다시 정원 가고. 힘 받고. 또 넘어지고. 사는 게 그런 것 같다.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하기 싫은 일,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해보는데- 지금 하는 일을 절대 전부라고 생각해선 안되고, 하기 싫은 일을 잘했을 때 '한 인간으로서'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요즘 한다.

나도 참 기분이 태도가 되는 미숙한 인간이다.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편식을 많이 한다. 사람이든, 일이든- 공부도 그랬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야 인내심도 기르고,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게 요즘 들어와 닿는다. 난 성장과 성숙 기회를 많이 차단하지 않았나 싶고. 요즘 귀차니즘을 많이 느끼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휘력도 달려서 내가 뭘 잊어가는 듯해 염려스럽다. 열정을 갖고 하던 일들도 심드렁해지고. 그럴 때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귀찮거나 내려놓고 싶을수록 하던 일을 꾸준히 하면서 흥미를 되찾도록 노력해야 된다. 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마음은 안 따라주는군. 물 흐르듯 이 상황을 흘려보내고 중심을 잘 잡고 싶다.

사진 1~4번 세미원과 창덕궁 후원에서 찍은 나님, 5번 후원 다녀온 날 샀던 노란 장미와 흰 소국. 사진=딱정벌레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궁에서 만끽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