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가 엇갈리는 두 휴양지
날짜로만 계산하면 이탈리아 여행 3일차 되는 날이다. 첫째 날에는 밀라노를, 둘째 날에는 피사를, 셋째 날에는 폼페이와 카프리섬을, 넷째 날에는 로마를, 다섯째 날에는 피렌체를, 여섯째 날에는 베니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6일에 걸쳐 있었다니 이 나라에 오래 있기는 했다. 그 짧은 여행 기간에. 그러니까 이탈리아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지 않는 듯하다. 사실 로마에는 둘째 날에 갔는데 숙소만 여기에 두고 둘째 날, 셋째 날에는 다른 지역을 다니다 돌아왔다.
로마 여행하던 넷째 날을 제외하면 대체로 동선이 길었다. 그래도 셋째 날은 알차게 보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그런가. 오전에는 폼페이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카프리섬에서 시간을 보냈다. 폼페이에서 열차를 1시간 타고 소렌토에 가서 배를 타고 카프리섬에 갔다. 배도 1시간 가까이 탄 것 같은데 몇 년 지나고 나니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도 가물가물하다. 폼페이와 카프리섬은 희비가 엇갈리는 휴양지다. 폼페이도 한때 로마 귀족 휴양지였지만 화산 폭발로 큰 피해를 입었다. 카프리섬은 아직은 여유로운 휴양지. 요즘은 다르겠지만.
9월 5일이었지만 날은 더웠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했고 난 흰색 긴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에 타기 싫어서 긴 옷을 입는 경향이 있다. 당시에는 살도 많이 쪘을 때라 많은 것을 드러내지 않는 긴 옷이 편하기도 했다. 폼페이도 제법 더웠다. 입장하기 전에 대기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기다리는 시간조차 내내 더웠으니. 입장했을 때도 실내에 구경하러 들어갔다 나올 때 말고는 그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따사로운 9월 햇살을 한껏 맞으면서 옛날 목욕탕과 여러 장소를, 화산재에 휩싸인 고대 유물을 봤다.
화산 폭발 피해를 입기 전만 해도 폼페이는 번화하고 문명이 발달한 도시였다. 농업과 상업 중심지였다고 하니. 로마 귀족 휴양지이기도 했고.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등이 그 당시에도 있었다고. 그러나 이곳이 발굴된 건 1500년대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도리어 유물을 약탈해가는 등. 제대로 된 발굴작업이 이뤄진 건 19세기 들어서였다고 한다. 그 전에도 발굴 작업이 있긴 했지만 약탈과 다름없었다고 위키백과에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화산 폭발로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참혹한 현장이 관광지가 된 게 씁쓸하기도 하다.
재난 현장을 둘러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대구 지하철 사고가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사고가 벌어지고 일주일 뒤쯤이었나. 친구와 그 현장에 갔다. 사고가 있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라서 역사 안은 새까만 재로 뒤덮여 있었고, 화마에 녹아내린 공중전화가 당시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보여줬다. 말이 나오지 않는 광경이었다. 5년 전만 해도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가면 그때 흔적을 유리벽으로 둘러쳐서 볼 수 있게 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그런 현장을 보면 역사 비극을 돌이키게 되고 여러 가지 다짐을 하며 주의하기도 한다.
폼페이에서는 극장이나 약국까지는 기억나지 않고 목욕탕은 인상 깊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떠오른다. 고대 도시였지만 앞서 말했듯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서 요즘 편의시설과 구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때도 목욕탕이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즐기고 싶어 하는 건 보편적인 구석이 있다 싶기도 하고. 발굴된 유물은 사진 속 저런 창고 같은 곳에 두고 접근할 수 없게 테두리 같은 게 세워져 있었다. 창살 구멍 같은 데로 사진을 찍어서 마치 안에 들어간 것처럼 사진이 나온 것 같다.
폼페이를 둘러본 뒤에는 열차를 타고 소렌토에 갔다. 카프리섬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하는데 선착장이 소렌토에 있었기 때문. 열차는 그리 깔끔하지 않았다. 옛날 비둘기호를 연상시킨다고 해야 하나. 여행 가서 탄 기차 가운데 특별히 깔끔한 차는 유로스타 정도였다. 기차는 우리나라 기차가 깔끔하다. 간혹 다음 승차자를 배려하지 않고 쓰레기를 그대로 둔 채 내리는 몰지각한 승객이 있긴 하지만. 그런 승객도 국외에서 더 많이 본 것 같다. 창문틀에 머리카락까지 끼어있고 나리나리 개나리.
열차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피곤했는데 앉아서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차창 너머 바라본 이탈리아 풍경은- 뭐랄까. 유럽에는 잘 사는 나라들이 많지만 이탈리아는 살짝 아래에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여행 갔던 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물가는 비교적 낮은 편이었고(물론 상대적이다). 길가 풍경도 로마나 피렌체, 베니스를 제외하면 도회적 느낌은 크게 들지 않았다. 여행지 모두 아름답긴 했다. 내가 이날 갔던 곳은 휴양지고 대도시는 아니라서 그렇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냥 시골에 온 느낌이었다.
소렌토는 노래로 접해서 이름만 귀에 익은 지역이었다. 선착장 주변에 가서 그런지 여기도 전형적인 휴양지 느낌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푸르고 시원해 보였다. 건물도 깔끔하고. 배가 출발할 때 밖에 나와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이탈리아 바다를 구경했다. 카프리섬까지 배로 이동하는 데에는 1시간 정도 걸린 듯하다. 배 안에 들어가 있다고 도착할 때쯤 밖에 다시 나왔다. 섬 전체를 조망하고 그럴싸한 사진도 남기고 싶어서. 배에서 바라본 카프리섬은 제법 아름다웠다. 이날 날씨도 좋아서 햇살 빨도 있었던 것 같다.
카프리섬은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외도에 갔을 때 느낌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전형적인 휴양지 모습을 띄고 있었고 사람들 발걸음도 여유로웠다. 경치도 좋고. 가벼운 차림으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았다. 난 물놀이할 채비를 하고 오지는 않았지만- 남이 쉬는 것만 봐도 내가 쉬는 기분이 들어 좋을 때가 있는데 카프리섬이 그랬다. 여기도 좋은 경치를 보려면 전망대에 올라가야 해서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기다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케이블카에서 내렸을 때 바로 보이는 전망도 장관인데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됐다. 진정한 장관은 더 올라가야 볼 수 있다는. 위쪽에도 이런저런 상점이 많았고 쇼핑하기에 좋아 보였다. 날이 더워서 슬러시를 사마셨다. 전망대 쪽 아래로 펼쳐진 절벽과 바다를 보니 태종대도 생각났다. 여기가 너무 좋아서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특별히 갈만한 곳이 더 있지도 않았지만- 햇볕만 아니라면 하루 종일 여기 죽치고 앉아서 멍 때리고 책도 읽으면 좋겠다고. 카프리섬 경관 자체가 좋아서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좋을 듯했다.
여기도 식물원이 있었는데 이름이 아우구스투스 가든이었다. 원래 이름은 크푸르 가든이라는데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카프리섬에서 전망을 잘 볼 수 있는 곳도 아우구스투스 가든 쪽이었던 것 같다. 사진을 다시 봐도 정원과 빨간 꽃, 조각상이 잘 어울린다. 위에서는 전망을 내려다보는 데 거의 시간을 보냈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서 여기저기 쏘다녔다. 오후에 다시 배를 타고 나폴리에 가야 했기 때문에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주변을 거닐면서 식료품 가게를 구경하고 젤라토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다.
카프리섬은 정말 좋았는데 사진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찍혀서 다양한 사진을 여기에 올리지는 못했다. 게다가 휴양지라서 헐벗은 사람들 사진이 많다 보니 올리기가 좀 그랬다. 그들이 스스로 신체를 노출하고 다녔다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그들 사진을 올리기는 좀 뭣한 듯. 사진에 얼굴은 안 나온다고 해도 말이다. 걸어 다니느라 몸이 힘든 여행을 주로 하다가 카프리섬에는 좀 쉬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어디 앉을만한 곳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여름 끝자락을 마지막으로 즐기는 의미도 있고.
날이 더워서 그런지 젤라토 아이스크림은 빛의 속도로 녹기 시작했다. 사진 찍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그새 흐물흐물. 아이스크림이 녹아서 못 생겨지기 전에 빠르게 먹어치웠다. 이탈리아에서 만족스러웠던 건 젤라토 아이스크림과 에스프레소를 실컷(?) 먹고 마셨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팔아도 잘 안 사 먹는 젤라토 아이스크림. 배가 오길 기다리며 선착장 주변을 쏘다니는데 길가에 핀 꽃이 참 예뻤다. 다시 생각해보니 카프리섬에서도 열나게 걸어 다닌 듯. 배 안에서는 꾸벅꾸벅 졸기만 했다. 멀미도 좀 났던 것 같고.
나폴리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동네 주변을 거닐며 맥주를 마시고 길거리 공연도 보고 슈퍼도 구경했다. 같은 숙소에 며칠 있다 보니 언제 뭘 했는지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솔직히 이탈리아 여행기는 기억을 거의 쥐어짜 내거나 사진을 보고 대충 기억을 더듬어서 쓰는 듯. 낮에는 더워도 밤공기는 서늘했고. 숙소는 로마가 제일 좋았다. 문제는 문이 잘 안 열려서 관리인 아저씨에게 번번이 부탁해야 했다는 것. 나는 이탈리아어를 못하고 아저씨는 영어가 안 되고. 서로 고생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