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리처드 파인만 교수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1, 2', '남이야 뭐라 하건'을 모은 합본판 '클래식 파인만'이 그 책이다. 파인만 교수를 알게 된 건 양자컴퓨터 기사를 쓰면서다. 천재 물리학자로 워낙 유명한 인물인데 문송한 난 서른 넘어서야 그를 처음 알게 됐다.
파인만 교수는 양자컴퓨터 개념을 처음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파인만 교수가 '양자현상을 이용한 컴퓨팅' 개념을 제시하기 전에도 이미 비슷한 개념을 먼저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고도 한다. 파인만 교수가 처음인 걸로 쓴 문헌도 여럿 있기도 하고. 일단 최초(?)의 가능성은 다른 인물에게 열어놓는 게 좋겠다. 아무튼 난 양자컴퓨터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례를 계기로 파인만 교수를 처음 접했다.
그로부터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반년여 지나고 나서다. 지난달 11일 페이스북에서 사이언스북스의 카드 뉴스를 봤는데 파인만 교수 이야기를 다뤘다. 마침 그날은 파인만 교수의 생일이었다. 리처드 파인만 탄생 102주년. 카드 뉴스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파인만 교수의 5가지 모습, 또 다른 하나는 첫 번째 부인 알린과의 러브 스토리. 역시나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알린과의 러브 스토리였다. 알린의 투병으로 결혼 생활이 짧았던 만큼 감동적이면서 가슴 시리고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둘의 연애기간은 길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만났다고 하니. 물론 중간에 다른 사람과 데이트할 때도 있었다. 알린은 임파선 결핵에 걸려 7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이를 알면서도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 이후 알린은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었고, 파인만은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 히치하이킹해서 병원을 찾아 알린과 함께 했다. 그러나 알린은 결국 세상을 떠났고 파인만은 처음에는 무덤덤한 척했지만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백화점 진열장에 전시된 옷을 보고 끝내 무너졌다고 한다. 클래식 파인만에서 '알린' 챕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는 나 자신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강요를 했음이 틀림없다. 그 후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울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오크리지에 가서 백화점 옆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전시된 예쁜 옷을 보았을 때였다. '알린이 저 옷을 참 좋아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부분을 읽는데 내가 괜히 울컥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약한 부분이고 나도 그게 힘들다 보니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눈물이 핑 도는데. 어떤 슬픔이 닥쳤을 때 당장 눈물이 나기보다 그냥 멍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나중에 눈물이 터질 때가 있다. 파인만의 그 이야기도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특히 가족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 당시에는 정신없어서 그냥 일 치르느라 바빴는데 어느 날 햇빛 쨍쨍한 날에 빨래를 널려고 하니 그제야 북받쳐 오른다는.
사진=픽사베이
파인만과 알린의 결혼생활은 5년 정도였다. 그러나 파인만은 '그 기간이 짧아서 안타깝니'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그 시간 동안 알린과 얼마나 행복했는지 이야기하는 데 그 내용이 인상 깊었다. 또 마냥 슬픈 일로 여기기보다 인생이라는 큰 맥락에서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놓고 의연하게 바라봤다. 단지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을 어떻게 보고 대처해야 할지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달까. 지혜로운 해석이었다. 마음에 와 닿은 내용이라 일부를 옮겨본다.
"당시의 나의 심정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예를 들어 화성인이 있다고 치고, 그들은 사고로 죽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그 화성인이 지구에 와서 칠팔십 년 정도 사는 인간을 만난다고 하자. 우리는 우리가 칠팔십 년 후에는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것이 없는 화성인이 보기에는 잠시 동안 이 세상에서 살다 죽는 인간들은 엄청난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죽음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와 알린의 결혼 생활이 다른 사람들의 결혼 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50년을 함께 살 때 우리는 5년을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죽음과 관련된 심리적인 문제는 결국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들은 50년씩이나 사니 우리보다 훨씬 낫다.'라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운이 없단 말인가? 신은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우리가 인생을 통찰하고 진정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이런 것들은 해답이 없는, 그래서 질문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 문제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은 단지 인생에서 일어나는 한순간의 우연일 뿐인 것이다.
사실 알린과 나는 함께 사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책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이 서로에게 했다는 약속이 눈에 띈다. 둘 사이에는 숨김없이 정직하게 모든 걸 이야기하자고. 이런 솔직함 때문에 두 사람이 더 가까워졌고 깊이 사랑했다고 파인만은 회고했다고 한다. 파인만은 알린 이후에도 결혼을 여러 번 한 걸로 알고 있다. 카드 뉴스에 보면 파인만은 "자신이 살면서 느낀 사랑 중에 알린만큼 깊고 진한 사랑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건 그 뒤에 그 사람과 만난 사람 입장에서 엄청 서운하겠는걸.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저런 말하는 거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파인만과 알린과의 러브 스토리는 너무 절절하지만.
사진=픽사베이
아무튼 정말 사랑하긴 했나 보다. 파인만 사후에 알린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가 발견됐다고 한다. 근데 그 내용이 애가 끓는다. 정말 사랑한다고 썼는데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이렇게 적으면 자신의 몸 구석구석 훈훈해지는 것 같다고 한다. 요즘 말로 정말 찐 사랑이었네. 그렇다. 그런 말이 막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근데 전할 수 없는 말이어서 혼자 읊조리거나 파인만처럼 저렇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거나 어디 메모하거나 대나무 숲 같은 데서 혼자 소리치고 마는. 다들 만났겠지.
너무 러브스토리만 이야기하는데 책 분량이 엄청나고 아직 한창 읽는 중이라. 과학자로서 그의 빛나는 면모를 조명할 거리를 책 안에서 아직 찾지 못했다. 일단 읽으면서 느낀 건 알려진 대로 정말 재치 있고 유머가 넘치는 괴짜 학자라는 것. 그는 과학 대중화에 힘쓴 만큼 어려운 내용도 쉽게 전달하면서 대중의 심리적 문턱을 낮춰보려는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있는 거고. 그러나 위 이야기만 갖고 순정남, 순애보 이렇게 평가하기엔 그 이후 완전 카사노바로 변신했다고 해서 뭐든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