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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정벌레 Dec 30. 2023

연말을 보내는 마음

더 늦기 전에 끼적이는 시시콜콜한 생각

사진=딱정벌레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연말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해야할 일을 찬찬히 해치우며 이런 회고도 쓰는 모습이었다. 현실은 날짜가 12월 31일로 넘어가기 전에 급한대로 우선 제목만 입력하고 미완성 상태로 일단 글을 올리고 보는 나만 있을 뿐. 한편으로는 회고에 많이 목말랐나란 생각도 들고.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유있는 마음으로 내게 있었던 일을 돌아보고 싶고, 생각하고 싶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날선 마음과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누리면서 둥글어진 마음과 시선은 확실히 다르니까.

본의 아니게 제주에서 7박 8일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많이 멍했다. 일주일동안 익숙했던 제주 풍경과 서울 풍경은 사뭇 달랐다. 제주에서 지낸 시간보다 서울에 있는 시간이 월등히 더 많고 익숙한데도 불구하고. 일주일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너무 많은 생각을 했고, 너무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껴선지 일주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거기에 살다 온 느낌도 들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런가. 폭설 때문에 한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 주로 있어서 그런가.

비행기가 두번 결항되면서 뜻밖에 장기 체류했는데- 종무식도 있고, 관광도 하고 여러 곳을 다니며 이런저런 일정을 수행했지만 폭설로 2박 3일동안 고립된 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다. 앞의 두 일정은 계획된 일정이었지만 이건 그렇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꼭 그 이유 때문만 아니기도 했다. 처음 겪어보는 기상 재난(?)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어느 순간 그 상황에 익숙해졌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냥 자연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난 운이 많이 좋았다. 누군가의 배려로 안전하게, 여유를 갖고 기다릴 수 있었으니까.

사실 그 시간동안 마음이 비로소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그 기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밖에 나가지 않고 실내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다가, 편지를 쓰다가, 책을 읽다가, 낮잠을 자다가, 씻다가, 밥을 먹는 일이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평범하지 않다는 건 평일에는 그런 일상을 보내기 어렵기 때문이고, 평범한 듯하다는 건 그 시간에 내가 했던 일이 튀거나 남다른 일은 아니고, 수수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이라서 그렇다. 돌아보니 그런 시간이 내게 허락된 게 참 행운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밖에도 그 시간이 감사하고 특별했던 포인트는 무척 많다. 다 말할 수 없고 머리와 마음으로만 담아두고 싶기도 하다. 좋은 기억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훼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잘 보존됐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은 말을 하기보다 그 일을 내 머리와 마음에 고이 간직하는 거다. 가끔 분주한 일상에 지치고, 날이 설 때 한번씩 추억하면서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기억. 날씨는 재난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재밌고 즐겁고 감사한 추억이 생겼다.

잘 있다 오니 연말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한 일도 있고, 하지 못한 일도 있다. 개인 프로젝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쓴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그것도 하루에 일정 시간만 떼어썼을 뿐이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아닌데) 그래도 올해 마무리해야 할 일을 매듭지어 다행이었다. 다른 백로그가 산적해있지만. 필름 스캔도 맡겨서 결과물을 전달받고, 사진 계정에 사진도 폭풍 업데이트하고, 건강 검진도 받고, 보고 싶은 공연도 보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오랜만에 엽떡도 먹었다.

집에서 이른바 장롱 카메라도 발견했다. 이모가 40년 전에 독일에서 산 니콘 필름 카메라. 이 카메라로 친척 언니들을 비롯해 내 사진도 많이 찍어주셨다. 내 어릴 적 사진 대부분은 다 이 카메라로 찍었을 것이다. 30년 전 설 명절 때도 이 카메라로 외사촌 동생들과 사진 찍는 연습을 했다. 그때 영상이 남아있는데 서로 찍어보겠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외숙모만 쳐다보던 모습이 웃기고 재밌었다. 안 쓴지 오래돼서 작동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찍어보려 한다. 그동안 다이아나 미니로만 찍었는데 새해에는 니콘으로 필름 촬영을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그게 새해 계획 중 하나다. 니콘을 쓰면 꼭 감도높은 필름을 고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하다 보니 연말도 훅 지나갔다. 2023년이 하루 이틀밖에 남지 않으니 짧은 기간에나마 못다한 일을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무리한 욕심도 부리고 있다. 연말에 또다른 수확이 있다면 6년 전에 사놓고 잘 입지 않은 후드 니트 조끼를 즐겨 입기 시작했다는 것. 다른 니트나 원피스에 다 잘 어울리고, 따스하며, 포근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옷도 예쁘다. 그때보다 체중이 많이 줄어서 이제 좀 괜찮아 보이려나 싶기도 하고. 제주에서 입은 검정색 후리스와 더불어 연말 내 교복이 될 듯한 옷이다. 따스한 니트와 함께 하는 겨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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