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작성하기 시작했다. 조직 종무식 못지않게 개인 종무식도 중요하다. 자신의 한 해를 정산하고, '아무개'라는 나 한 사람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고를 허투루 하고 싶지는 않다.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도 않고. 2022년만큼이나 2023년에도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한 해라서 이것저것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건 누구에게 선언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고 그냥 이렇게 혼잣말하듯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게 더 잘 어울린다.
사실 한 해를 통틀어서 회고하기보다 그냥 2023년 마지막 주를,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고 싶었다. 늘 해가 저물면 아쉽다. 시도하지 못한 일이 안타깝고, 한해동안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얼마남지 않은 시간동안, 그 한해동안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계획한 일을 조금이나마 실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걸 억지로 하기도 했는데- 문득 그 일의 질을 생각하기보다 그냥 했다는 데 만족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동영상 강의를 보는 일도 그중 하나. 백색소음처럼 듣더라도 안 듣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합리화하기도 하고.
2023년 마지막 날에는 잠을 푹 잤다. 정확히는 그 전날 잠을 잘 잤다는 의미인데- 숙면하고 일어나서 교회갈 채비를 하고 이모와 예배를 다녀왔다. 다른 이모님이 편찮으셔서 이모가 김치와 나물 등 먹거리를 챙겨가셨는데 이모댁에 들러 전달드리고 수다를 떨다가 나왔다. 언니들이 주문한 점심(짜장면, 짬뽕, 탕수육)도 먹고. 이모는 집으로 귀가하시고, 난 지난 10월에 서비스로 받지 못한 일회용 렌즈를 받으러 여의도까지 갔다. 이사하고 난 뒤로 서울 서부 쪽은 이제 내게 너무도 먼 곳이 됐다.
여의도역을 나와서 국회의사당의 푸른 돔을 보고 미성아파트를 둘러보는데 괜히 반가웠다. 안경점에서는 무척 기민하게 렌즈를 찾아줬고, 난 필름을 맡기러 망우삼림에 바로 가려다 발길을 돌려 카페꼼마 신영증권점에 갔다. 예전에 반디앤루니스가 있던 시절부터 자주 가던 북카페이자 서점이었다. 거기서 글도 많이 썼다. 출퇴근하듯 다니던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브런치에 올라온 글 가운데에는 거기서 쓴 글도 많다. 그 주변은 이런저런 추억이 많다. 눈 쌓인 어느 6년 전 겨울, 광화문과 여의도를 총총걸음으로 다니며 취재하던 기억도 있고.
카페 꼼마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눈에 띄는 건 직원들이 추천하는 책 코너가 생긴 것. 손글씨로 쓴 책 추천사가 정감가고 인상깊었다. 해외 서점에 가면 간혹 이와 비슷한 풍경을 보는데(지역 작가 작품 코너라든가, 이 서점이 추천하는 책이라든가) 이런 대형 서점에서도 중소 서점에서 더 많이 볼법한 아날로그 감성을 접할 수 있어 좋기도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신영증권 건물 1층은 항상 서점이 입점해 있는데 만약 회사 측 고집이라면 꽤 괜찮은 고집이란 생각도 들었다.
서점을 둘러보고 거래소 앞에 가서 버스를 기다렸다. 새해 파생상품 신고식을 알리는 빨간 깃발이 거래소 담장 주변에 걸려 있었다. 1월 2일에 저 행사를 진행하겠구나. 600번 버스가 와서 오랜만에 이 버스를 타고 마포대교를 건너 서대문역까지 갔다. 연말에 행사가 있어선지 버스가 우회 운전을 하는 바람에 도중에 내려야 했다. 결국 지하철을 갈아타고 을지로 4가까지 가서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탔는데 처음부터 그냥 여의도에서 지하철을 탈걸 그랬나 싶었다.
망우삼림에서는 제주도에서 찍은 마지막 필름 1롤과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필름 2롤의 필름 스캔을 맡겼다. 장롱 필름은 너무 오래돼서 결과물에 큰 기대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맡겨보기로 했다. 연말이고, 정초에다, 물량도 많아서 화요일 밤 늦게 결과물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스캔은 기본 버전으로 하기로 했는데 코닥 울트라맥스 36컷짜리는 1000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필름을 대량으로 맡기느라 스캔은 일단 제일 저렴한 걸로 맡기고 있다.
저녁 시간이라 밥을 먹고 싶어서 에그슬럿에 갔다. 제주에 갔을 때 지인이 먹고 싶어 한 식당이라서 생각났다. 나도 거기서 뭘 사먹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아보카도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가격대비 양이 많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삭 토스트가 더 풍성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다음에는 다른 메뉴를 먹어보고 싶었다. 서브웨이도 괜찮고. 원래는 내 작업실(?)인 타스 카페에 가서 일을 보려 했는데 송구영신예배를 가야하고, 가고 싶어서 지하철을 타고 이촌역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서울을 한바퀴 돈 하루였다. 귀가 경로까지 고려하면.
송구영신예배를 가기 전까지 릴리즈 노트를 작성했다. 그때부터 뒤늦은 자각이 들었다. 이걸 좀 미리하지 그랬나 싶기도 하고. 늦은 건 아닌데 이제 휴가도 끝나가고 새해 첫 출근이 얼마 남지 않은데 반해 해야 할 업무가 자잘하게 이것저것 있어서 서서히 여유없는 일상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했다. 근데 한편으로는 업무를 보는 시간이 왠지 좋기도 했다. 일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고, 그 생각은 어디에 메모해두고 싶었다. 감이 떨어지거나 머리가 굳는 것보다 계속 업무 내용을 두뇌를 자극하고 회전시키는 게 더 좋기도 하고. 새로운 기능도 흥미로웠다.
문득 최근 느낀 여러가지 자격지심과 자괴감이 떠올랐다. 난 내가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일에서 위안을 얻을 때가 많고, 일로 자존감을 채우려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일로 도피하려 할 때도 많다. 개인적으로, 혹은 한 사람으로서 결자해지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일에 숨으려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근래 들은 여러 못난 생각과 위축된 마음이 일로 치유되는 느낌도 들었다. 그냥 일로 존재 의의를 확인하거나 내 자리를 비로소 찾는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른 자아에서도 자존감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작년만 해도 예배당에 빈 자리가 많았다. 코로나가 종식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사람들이 조심할 때라서 그런지 송구영신예배 인원도 적었는데 이제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는 게 실감났다. 본당에 자리가 없어서 지하로 갔는데 거기도 자리가 꽉 찼다. 송구영신예배는 늦게 끝나서 부담이지만 그래도 예배하고 기도하면 새해를 맞이하는 게 좋다. 내가 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렇기에 그 자리에 더 나아가고 싶고, 그냥 말씀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송구영신예배 한철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한번도 내 장기나 재능으로 찬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그럴만한 장기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비올라를 배운다면 그 악기로 찬양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는 그냥 그 악기를 배우고,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나 연주하고 싶었는데 단지 생각이 거기에 머무르는 게 좀 부끄럽다 싶었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이 열정적으로 바이올린을 켜며 찬양하는 모습이 인상깊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하나님을 만나는 데 내가 방해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부끄러운 일이 많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에서도 따뜻한 백설기를 하나하나 나눠주셨다. 교회 외벽에 화면을 띄워서 사람들 얼굴도 비춰주고, 2023년이 몇분 남았는지 시간도 보여줬다. 내가 봤을 때는 40분도 안 남았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 트리 사진을 찍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2023년이 끝나간다 생각하니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고. 나와 나름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고. 그렇게 버스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그게 내 2023년 마지막 날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