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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망 좋은 방'과 피렌체 추억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모리스가 떠오른 작품

by 딱정벌레
영화 '전망 좋은 방'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전망 좋은 방'은 1989년 개봉작이다. 최근 31년 만에 영화관에서 재개봉했다. 사전 정보가 거의 없이 봤다. 알고 보니 영화 '모리스'와 '콜미 바이 유어 네임' 감독이 만든 작품이었다. 어쩐지 분위기나 영상미가 모리스와 비슷한 느낌도 들었다. 모리스에 나온 배우도 여럿 보였다.

사실 최근 영화인 줄 알고 봤다가 어딘지 화면이 오래된 느낌도 들었다. 또 아는 배우인데 너무 젊어 보여서 혹시나 했더니 30여 년 전 작품. 모리스를 극장에서 봤을 때와 비슷한 충격(?). 그때는 휴 그랜트를 보고 '60대일텐데 왜 저렇게 젊지?'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그가 20대 후반에 찍은 작품.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이탈리아 피렌체와 영국이다. 영국은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잘 모르겠다. 오랜만에 본 피렌체 모습은 반가웠다. 늘 관광객으로 들끓던 곳인데 영화 속에서는 사람도 적당하고 한산했다. 돌이켜보니 '30여 년 전에는 저랬구나', '성당 건물이나 베키오 다리 근처는 별로 다를 게 없네, 자로 잰 듯 정갈한 대칭 건물도' 이런 생각이 든다.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피렌체 단테 생가. 오른쪽은 단테 동상. 사진=딱정벌레

이탈리아 여행을 되게 좋아한 건 아니지만 피렌체는 마음에 들었다. 밀라노, 로마, 나폴리, 폼페이, 베니스 가운데서 꼽자면 짧게 있었던 피렌체가 좋았다. 다른 지역보다 깔끔하고 대칭미가 돋보이는 건물이 세련돼 보였다. 그러나 집시가 다른 지역보다 더 공격적이고 무서워서 다니기 불편했다.

피렌체에 있는 단테 생가는 반가웠다. 대학 시절 전공수업인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정치사상가 중 하나로 단테를 다뤘다. 별로 비중 있지 않았는데 기말고사 시험이었나 아무튼 문제가 출제됐다. 전혀 예상 못한 문제라서 답을 잘 쓰지 못했다. 시험이 끝난 뒤 친구에게 "단테 XXX'라고 짜증을 냈다. 근데 친구가 그걸 듣고 매우 즐거워했다. 단테님, 죄송합니다.

영화 '전망 좋은 방'에 나온 피렌체 전경. 사진=네이버

아무튼 영화로 피렌체를 다시 봐서 좋았다.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해외여행은 물 건너가서 그런지 영화관에서도 해외 지역별 기획전을 진행하더라. 어떤 날은 뉴욕, 어떤 날은 또 어디 이런 식으로. 하긴 파리나 런던도 많겠다. 다시 봐도 피렌체는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거기서 언니에게 줄 핸드백을 샀는데 금액을 고려하느라 좀 더 큰 가방을 사주지 못해 미안했다. 울적하기도. 난 참 별게 울적하구나. 그래도 언니가 마음에 들어하며 지금도 열심히 매고 다녀서 고맙다.

역시 영화와 상관없는 추억팔이. 이 영화의 줄거리나 배경, 분위기가 영화 '비커밍 제인'이나 소설 '오만과 편견'을 떠올리게 했다. 비커밍 제인은 제인 오스틴을 다룬 영화고, 오만과 편견은 제인 오스틴이 쓴 작품. 여주인공 성향이나 분위기가 제인 오스틴과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과 비슷했다. 주체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며 마음의 감옥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제인 오스틴은 갈림길에서 사랑, 욕망보다 글, 야망을 택했다. 이와 달리 오만과 편견, 전망 좋은 방의 여주인공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 오만과 편견과 실제 제인 오스틴 삶을 비교하면 마음이 짠하다.

피렌체 베키오 다리. 사진=딱정벌레

제인 오스틴과 전망 좋은 방은 별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캐릭터에서 제인 오스틴을 느낀 건 나뿐만 아닌 듯하다. 이모에게 이 영화를 이야기했더니 "그 당시 제인 오스틴식 저런 영화 유행했다"라고 말씀하셨다. 1989년. 과거보다 대중문화도, 물질도 풍요롭고 여성의 사회진출도 전보다 더 활발한 시절. 냉전이 붕괴될 조짐도 보이고. 우리나라는 민주화 이후였고. 기억이 별로 없는 시절인데 내 멋대로 그 시절 특징을 유추해본다. 참고로 이모는 이 영화를 본 건 아니었다.

"저도 제인 오스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왜 이런 영화가 유행했을까요?"라고 여쭤봤다. 이모 왈 "제인 오스틴의 재발견, 여성들의 의식이 눈뜨는 시절일 거야" 외국도 여성 인권은 우리와 별 차이 없고 이모가 직장 다닐 때는 더 엉망이었다고. 이모는 학교의 나이 많은 남자 교사들 들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시고 씩씩하게 다니셨다. 교장에게 한소리 듣고 나가면서도 일부러 들으란 듯이 복도에서 쾌활하게 다른 교사에게 인사하고. 다른 교사들이 "저거 주먹 불끈 쥐고 다니는 것 좀 보라"고 말했다고 하니. 나도 그런 깡을 배워야 하는데.

저런 이야기하다가 내가 1만원짜리 빙수를 혼자서 순삭했다고 하니 토끼가 '짝짝짝' 박수를 치고, '대다네'라며 양발로 따봉을 날리는 이모티콘을 이모가 보내주셨다. 그건 마치 아기들이 우유 다 마시고 나서 우유병을 옆에 턱 하고 내려놓았을 때 칭찬받는 느낌(나도 어렴풋하게 우유병 들던 기억이 있다). 역시 또 영화, 제인 오스틴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는군. 대화는 오늘 장을 뭐 봤는지 이야기로 귀결됐다.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 장면. 사진=네이버

스포일러는 할 수 없으니 기억에 남는 점만 말한다면. 이 작품음 E.M. 포스터의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등장인물 심리를 자세히 묘사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는 '왜 저러지?' 싶은 포인트가 있었다. 특히 남주인공이 그랬다. 이 영화에서는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가 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영화만 봤을 때 그 첫 키스는 남주인공의 일방적인 행동이었다.

난 극 중에서 이런 장면 보면 불편하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다. 그 이유는 상대방과 교감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말 그대로 일방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주변에도 그런 식으로 첫 키스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기억을 불쾌하게 여긴다. 소설에서는 그 상황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아무리 열정적인 몽상가이며, 잘생기고 멋지다고 해서 이런 걸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본다. 여주인공은 이 사건 이후로 극심한 감정 혼란을 겪는다.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그것도 무의식 중 그의 욕망이었겠다 싶지만. 잘 모르겠다.

남주인공이 나무 위에 올라가 '아름다움'과 '신뢰'라는 단어를 부르짖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열정적인 몽상가인지 보여줬다. 여주인공에게 기습 키스를 한 뒤에는 뿌듯한 표정으로 비 맞으며 걸어서 숙소에 돌아왔고. 극 중에서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마음에 귀 기울여주는 건 그의 아버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 아버지는 남녀 주인공이 마음을 확인하는 다리 역할도 했다. 그 아버지는 그가 평소 자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를 저렇게 소리친다고 설명했다. 누가 보면 미친 행위일 수 있지만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는 다르게 봤다. 그러나 그 나무는 크고 굵지 않고 가늘고 연약해서 이내 곧 부러졌다. 사소하지만 난 나무를 괴롭히는 이 장면이 못마땅했다. 그냥 광야에서 소리치면 되잖아.

피렌체 어느 거리. 사진=딱정벌레

여주인공은 차분한 듯 보이지만 평소 베토벤 곡을 즐겨 연주하며 격정을 토해내는 인물이었다. 첫 키스 사건을 뒤로 하고 영국에서 정혼자와 약혼한 이후로는 슈베르트 곡을 연주했다. 내가 슈베르트 곡을 잘 아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그가 이렇게 자신의 격정과 욕망을 누른 채 현실에 순응하며 살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그는 그동안 외면했던 자신의 진심과 욕망을 받아들였다.

그의 사촌 언니는 정숙한 여성 코스프레를 하며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관계를 발전시킬 기회를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친구에게 그 일화를 이야기했고, 그게 소설로 나오는 데 실마리를 줬다. 그래도 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은 없다. 그는 그저 'Poor Charlotte'일 뿐. 나중에는 사랑을 되찾는 조력자 역할도 한다. 어쩌면 그 당시 인생 경험이 동생보다 더 풍부한 여성으로서 그가 도와줄 수 있는 최선이 그거였는지도 모른다.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두 주인공이 강을 내려다보던 장면. 사진=네이버

역시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남주인공이 사촌 언니 앞에서 여주인공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장면이었다. "서로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알아요?" 영화 트레일러 영상에도 나오는 대사인데 영화에선 맥락이 많이 생략되다 보니 그가 어떤 점에서 그런 걸 느꼈는지 궁금했다. 맞는 사람인지는 더 만나봐야 아는 건데. 오히려 상대방을 좋아할 때는 내 감정이 앞서다 보니 상대방과 내가 많이 통하고 닮았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도 많은 것 같다. 서로 잘 맞는다는 게 꼭 공통점이 많아야만 가능한 것도 아닌 듯하다. 다른 점이 많지만 그게 잘 융화되면 그것도 잘 맞는 거니까.

역시나 영국 영화라서 소녀의 유흥 거리도 '차 마시러 가자'는 문장으로 표현됐다. 그거 보니 오랜만에 홍차를 마시고 싶더라. 결국 오늘 아침 오랜만에 영국에서 산 트와이닝 홍차를 내려 마셨다. 틴케이스에 담긴 홍차 가루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음엔 어떤 홍차를 마실까. 날이 무덥지만 오늘은 제법 한산해서 뜨거운 홍차도 마실만 했다. 사실 홍차만 마신 건 아니고 우유를 부어 밀크티로 마셨다. 플라잉 스콘도 같이 먹었어야 하는 건데.

피렌체 대성당. 사진=딱정벌레

아무튼 피렌체를 다시 여행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잘 봤다.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워서 여운이 컸다. 서푼도 안 되는 TMI를 남발한다면 옥스퍼드의 탄식의 다리가 피렌체 베키오 다리를 닮았다. 그걸 따온 건지 확인하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는 데 지난 겨울이었나, BBC 라디오 4에서 '왜 여성은 소설을 읽는가'를 주제로 5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게 떠올랐다.

그 다큐에서는 현대 여성이 현대 소설 시장의 큰손인데 그들이 무엇을 언제, 어떻게 읽고 소설이 그들에게 중요한 이유를 다뤘다.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등 고전의 시들지 않는 매력도. 오만과 편견의 경우 배우 콜린 퍼스가 다시 역으로 출연한 1995년 BBC 드라마가 현대에도 작품 인기를 이어가는 데 영향을 줬다고. 자기들 자랑하는 건가? 사실 그 버전은 EBS 세계명화극장에도 방영됐다. 나도 그 버전 영향을 받아서 고등어 시절 친구 생일 선물로 옥스퍼드사 버전으로 오만과 편견 영어 원서를 교보문고에서 사서 줬다. 영어를 즐겨 공부하는 친구라서 그거 전하고 내가 괜히 뿌듯했다. 원서 특유의 갱지 같은 종이책 질감도 좋고. 가볍고. 아무튼 전망 좋은 방은 여러 방향으로 생각 회로를 작동시킨 작품이었다.

BBC 라디오4 다큐멘터리 'Why women read fiction' 홈페이지. 사진=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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