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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어디까지 기대야 적당할까

라떼를 그만 마시고 싶은 이유

by 딱정벌레
사진=픽사베이

지난 봄이었다. 오랜만에 학보사 동기, 선배 이렇게 5명이 대학로에서 만났다. 저녁을 먹고 낙산공원에 올라 함께 노을을 봤다. 내려오면서 카페에 들렀다.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나눴다. 방송작가 13년 차인 한 선배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선배는 '스타킹', '댄싱 9', '냉장고를 부탁해', '씨름의 희열' 등 유명 프로그램을 많이 맡았다. 선배는 코로나 19 이후 방송가에서 제작이 엎어진 프로그램이 많다고 하셨다. 요즘 방송가는 안전하게 갈만한 아이템을 다루려는데 그게 주로 트로트나 탑골 이런 거라고.

선배에게도 그런 프로그램에 합류하라고 제안이 왔다고 하셨다. 그러나 선배 눈은 다른 곳을 향하는 듯했다. 트로트나 탑골 콘텐츠를 만들기보다 "시즌제로 짧게 끝나더라도 젊은 층과 호흡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라고. 난 선배의 그 마음이 듣기 좋았다. 누군가에겐 그 바람이 현실적이지 않게 보일지 모른다. 혼란의 시기에 안전한 또는 조금은 뜨뜻미지근한 아이템을 다루기보다 불안하더라도 새로운 걸 실험하고 모험하고 싶어 하는 용기가 대단해 보였다. 관성에 젖지 않고 도전하려는 마음도 소중해 보였다.

요즘 추억팔이 콘텐츠를 접하면 지난 봄 선배 이야기가 종종 생각난다. 사골 우려먹듯 끊이지 않는 이 탑골 콘텐츠의 끝은 어디일까. 탑골 콘텐츠에 시작이 따로 있던 건 아니고 늘 있었던 것 같다. 유행은 돌고 돌고, '라떼는 말이야' 이런 태도도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식품업계는 장수 브랜드를 리뉴얼해서 맛을 다양화하거나 IP를 활용해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내서 과거 유산에 기댄다. 대선주조는 과거 대선소주와 포장을 다시 선봬 인기를 끌면서 무학, 하이트진로 등 다른 주류업체 신제품 개발에도 영향을 줬다.

사진=픽사베이

사람은 추억으로 살기도 하니까. 과거를 되새기고 이걸로 이야기를 만드는 게 자연스러운 듯도 하다. 나도 실은 추억팔이를 많이 한다. 그걸 꽤 즐긴다.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지", "그때 그런 생각을 했지" 이런 글을 많이 쓰기도 하지만. 평소 옛날 음악을 많이 듣고(30대 이후로 플레이리스트가 잘 업데이트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어릴 때부터 옛날 문화를 좋아했다. 옛날 가수 음악을 들으면 내가 그 시절을 함께 호흡하지 못한 게 아쉽고. 노인들이 많이 가는 거리나 명소가 내 취향에 맞았다. 옛날 문화를 아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내 추억팔이 대상은 내가 영화를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와 내가 한때 그 일부였거나 또는 내 일상에 있었던 어떤 과거.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전자는 앞서 이야기했듯 화려한 시절이 있었고 많은 유산을 남겼는데 그게 잘 나갈 때 내가 즐겼다면 더 재밌었겠다는 아쉬움이 있고. 후자는 나도 적잖은 세월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험치가 늘어나고, 추억거리로 쌓인 것. 그걸 가끔 떠올리면 재밌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그 재미로 추억팔이하는 것. 영화 '위아영'에서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아담 드라이버를 보며 많이 찔렸다.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추억팔이 콘텐츠가 과잉됐다고 느끼면 위기의식을 느낀다. 요즘 자주 그렇다. 지겹고. 코로나 19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 것 같은 시기를 살다 보면 '과거를 너무 그리워하는 게 옛날에 안주하고, 생각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을까'싶은 생각도 든다. 과거를 노래하고 추억하는 건 개인의 자유지만. 그게 무미건조한 현실에 재미와 감동도 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두고 통찰을 줄 수도 있지만. 현재에 어떤 의미를 주는 게 아니라면 적당히 즐겨야겠다 싶다.

사진=픽사베이

추억팔이를 즐기는 성향 때문에 대학시절 학보사 기획회의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이것도 추억팔이지만). 그때 방학 때마다 주간교수, 교열 조교 선생님들과 다음 학기 전체 기획회의를 했다. 다음 학기 노선을 밝히고 기획 큰 주제를 공유했다. 질문에 답도 하고, 토론도 하고, 제안도 받았다. 쓴소리도 듣고. 그때 우리 부서 기획이 추억팔이 콘텐츠가 많았다. 크게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과거 느림 의미를 돌아본다는 취지지만. 사회학과 대학원생인 한 교열 조교 선생님이 이렇게 지적했다. "너무 과거지향적이고 목가적이네요"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을 곱씹을수록 너무 맞는 지적이고 그때 그 이야기를 해준 그 선생님이 고마웠다. 젊은 세대 시각에서는 옛날의 느림 문화가 멋있어 보이고, 요즘 놓치고 사는 것을 돌아보게 하기도 하지만. 그게 요즘 시대에 적용할만한 건지, 그걸 꼭 좋다고만 할 수 있을지. 그 문화도 사실문제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로 나아가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봐야 하는데. 옛 생각에 너무 머무르고 그걸 그리워하면 미래지향적 생각을 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

탑골도 여러 취향 일부니까 그걸 아예 없앨 수 없겠지만. 그게 주류를 차지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도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계기는 많다. 콘텐츠도 풍부하고. 굳이 TV에서 안 봐도 유튜브에서도 많이 볼 수 있고. TV 시청층이 고령화되다 보니 거기 맞춰서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사회-경제-문화 주류가 40대라고 생각한다. 방송가도 40대 제작자가 중요한 위치에서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다 보니 그게 콘텐츠에도 반영된다 싶기도 하다. 그들의 권력 행사가 탑골 콘텐츠 양산으로 이어지는 거 같다는 뇌피셜.

젊은이들 불러다가 옛날 콘텐츠 이것저것 보여주고 알아맞혀 보라면서 '세대공감' 어쩌고 하는 거 보면 그 젊은이들이 불쌍해 보인다.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저걸 왜 알아야 하지? "아, 너흰 그걸 모르는구나", "아하", "아하", "아하" 탄식만 나오는 걸 보면 전파 낭비, 시간 낭비 같기도 하고. 그런 거 몰라도 사는 데 하나도 지장 없다. 그런 거 관심 있으면 스스로 찾아보는 거지 그런 거 보라고 할 시간에 요즘 나오는 새로운 걸 배우는 게 훨씬 더 도움될 텐데. 기술이든, 담론이든, 노래든, 영화든, 소설이든. 본인이 좋으면 보는 거지만.

사진=픽사베이

어제 랜선 트레바리 마지막 미션을 수행하는데 주제가 이랬다. "여러분은 인생의 후반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모습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은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신가요? 또는 하실 계획인가요?" 어떤 사람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하고. 난 고민하다 이렇게 썼다. "녹슬지 않고 늘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받으며 쇄신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중략)... 젊은 사람과 대화가 통하면 좋겠네요. 오늘 라디오에서 우스갯소리를 들었는데요. 끼리끼리는 사이언스라고 하더라고요. 전 제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중략)..."

그렇게 쓰다 보니 생각이 정리됐는데 라떼 열풍을 접하다 보니 그 마음이 진심이다. 근데 내가 이걸 위해서 뭘 노력하나 생각해보면. 적극적으로 하는 건 없는 듯하다. 이건 뼈아픈 부분. 그런 건 사람을 만나야 충족되는 것도 있으니까. 인간관계를 업데이트해야 하고. 인생의 후반부가 먼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최근에 육중완 밴드가 새 앨범을 냈는데 앨범 제목이 '부산직할시'다. 오늘 라디오에서 '부산직할시 사하구 감천2동'이란 노래가 나왔는데 그 시절 그 지역 향수를 한껏 노래했다.

육중완 밴드는 과거 정서를 노래해도 그걸 토대로 새롭게 뭔가를 창작했다. 이건 과거를 자기복제하는 일반 추억팔이와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모든 레트로, 뉴트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게 미래 세대에게 호소력이 있으면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고민하고, 변형을 시도하는 것도 모험이고 도전이니까. 그 과정에서 단순히 과거 콘텐츠를 반복하는 것과 또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난 과거를 재료 삼아 어떻게 발전해야 할까. 그걸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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