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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리뷰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연은 있다

by 정 현
"괜찮은 척하지만
사는 게 맘 같지는 않네요
저마다의 웃음 뒤엔 아픔이 있어
하지만 아프다고
소리 내고 싶지는 않아요"
- 싸이 <기댈 곳>-

오늘 책의 소재는 저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친한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할, 아니 친한 사람이기에 더 말하지 못할 사연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연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이 책은 이렇듯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소재인 예술 작품을 담은 책이다.


저자가 마련한 전시 공간 안에는 아날로그 전화기가 있다. 관람객이 수화기를 들어보면 타인의 숨겨온 사연이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온다.

몇 개의 아날로그 전화기 옆에는 공중전화 부스가 마련되어 있다. 관람객은 부스 안의 전화기를 통해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을 수 있다.

이렇게 쌓인 사연들은 다시 이후에 방문한 관람객에게 전해진다. 사연들은 쌓이고 쌓여 3년간 약 10만 통이 되었다.


"나 사실 오빠 직업 보고 결혼했어요. 가끔 돈으로만 보이기도 해."
"매번 그냥 한번 해보는 거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매번 너무 간절하다."
"나의 임용 삼수 실패, 어디 가서 말도 못 해, 이제 내 꿈은 뭘까."
"그만하고 싶다. 그만하고 싶어요. 전부 다. 쉬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 쉬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
"스무 살이 되지 못한 네가 너무 그립고 보고 싶다."

참 새로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털어놓은 사연들은 무겁고 강렬했다. 내겐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에게도 절절한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거침없이 다가온다.

전시는 21년에 끝나 실제 목소리로 사연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사연의 종류도 다양했다.

자신을 다독이는 사연, 누군가를 응원하는 사연,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는 사연,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거나 욕하는 사연, 뒤늦게 털어놓는 미안함과 감사함 등...

각자의 사연이 감정을 건드려 여운을 남긴다.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과시하며 공감을 요구하는 말투가 아니기에,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을 뿐이기에, 오히려 내게 동질감이 각인된다.


이는 눈앞에 있음에도 가면을 쓴 대화와 달리, 정해진 대상 하나 없지만 솔직함이 배어 나온 소통이다.

마음의 위로와 함께, 그저 '표면적인 대화=소통'이라는 인식이 퍼진 세상에서 진짜 '소통'이 무엇인지도 고민하게 된다.


이 책은 머리에 기록된다기보다 마음에 새겨진다고 표현하고 싶다.

1522-2290에 전화하면 지금도 자신의 목소리를 흘려보낼 수 있다.

털어놓지 못할 사연이 있다면 혹은 털어놓을 용기가 안 난다면 이 책을 읽어보고 전화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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