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랍장 속의 증명사진을 보며
오랜만에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지를 정하고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나니 추가적으로 준비할 것들이 떠올랐다. 이번 여행은 자유여행이라 국제 운전면허증을 챙겨야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국제 운전면허증에 붙일 사진이었다. 언젠가 여권 갱신 시 사용했던 사진이 있을 것 같아 평소에 잘 열지 않는 서랍장을 열고, 온갖 서류와 잡동사니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영수증, 정체 모를 설명서들, 예전에 모아두었던 스티커 사진들, 그리고 어딘가로부터 전단지로 재활용됐을 법한 종이들 사이에서 작은 봉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손가락으로 꺼내 들고 앞면을 확인하는 순간, 잊혀 있던 추억이 고개를 들었다.
봉투를 열자,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고등학교 학생증에 붙여 있던 증명사진. 앳된 얼굴, 어색한 미소, 그리고 옷깃이 조금 삐뚤어진 모습. 그걸 보는 순간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라고 생각하면서, 아무 표정 없는 모습은 당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게 한다.
다른 사진을 보았다. 마주한 것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시절의 증명사진이었다. 교복에서 사복으로,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바뀌던 시기. 아직 양복이 몸에 덜 맞는 듯했고, 표정 어딘가에는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말이 막연한 기대였던 때. 실수도 많았고, 혼나기도 했고,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자신만만했다. 뭐든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그만큼 세상이 새롭고, 배울 것이 많았다.
그다음에 나온 것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회사에서 사용하던 신분증 사진. 눈빛엔 묘한 단단함이 자리 잡기 시작한 모습.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짐이 어깨에 얹히며, 조금은 느려지고 조금은 조용해진 표정. 매달 반복되는 월급날을 기다리며, 앞만 보고 달리던 그 시절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은 몇 년 전 여권 사진.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 반 한숨 반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얼굴선은 둥글어지고, 눈가는 조금 깊어진 주름이 자리 잡았다. 예전보다 무표정해졌고,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만 눈빛에는 알게 모르게 피로가 묻어나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이 모습도 참 괜찮아 보였다. 버텨온 시간, 책임져온 순간, 쌓아 온 경험이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서랍장 앞에 쪼그려 앉아 사진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릴 때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줄 알았다. 하루가 길었고, 방학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한 걸까. 돌아보니 어느 한순간도 허투루 지나간 적은 없었다. 매 시절의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온 흔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꿈꾼다. 더 멋지게, 더 성숙하게, 더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전 사진을 보면 깔깔 웃기도 하고,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충분히 떨어져 바라보니, 그 모든 때의 내가 참 사랑스럽다. 미숙하던 시절도, 실패를 두려워하던 시절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시절도, 모두 현재의 나를 만든 과정이었으니까.
사진들을 천천히 봉투에 다시 넣으며 나는 생각했다. 다음에 또 증명용 사진을 찍게 될 때,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더 많은 주름이 생겨 있을지도. 또 다른 걱정을 품고 있을지도. 그러나 분명 또 한 번의 삶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이, 미래의 내가 서랍 속 사진을 꺼내 들며 미소 짓게 할 것이다.
서랍을 닫기 직전, 지나온 날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건네는 작은 응원. 나는 여전히 변하고 있고, 그 변화 속에서 또 하루를 채워가고 있다. 언젠가 또 서랍을 뒤적이는 날이 오면, 그때의 나는 또 어떤 나를 발견하게 될까.
서랍장을 닫고 거울을 본다. 내일 말끔한 모습으로 사진관에 가야겠다. 현재의 나를 남기고 과거의 나를 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