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35주년 날에...
오늘은 입사 35년이 되는 날이다. 달력에 특별히 표시해 두지도 않았고, 누군가가 먼저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숫자가 또렷이 떠올랐다. 35년. 짧지 않은 시간이다. 누군가에게는 한 회사의 역사보다 길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대부분일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나는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 한 조직의 구성원으로 살아왔다.
언젠가부터 이 날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날이 되었다. 축하보다는 격려에 가깝고, 자랑보다는 다독임에 가까운 마음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라는 말을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으니, 내가 나에게 해 주는 날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입사 몇 년 차, 몇 번째 프로젝트, 몇 번의 성과 같은 것들이 더 중요했다. 숫자는 늘 앞을 향해 있었고, 나는 그 숫자를 따라가느라 바빴다.
처음 입사하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추운 겨울, 딸랑 가방하나 매고 올라와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 장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의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일하게 될지, 35년 뒤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하루라도 빨리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흘렀다. 야근이 일상이던 시절도 있었고, 일이 삶의 전부처럼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다. 성과가 나면 기뻤고, 실수가 있으면 밤잠을 설쳤다. 조직의 변화에 따라 역할이 바뀌고,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분명 많은 것을 얻었다. 경험, 노하우, 사람을 보는 눈, 그리고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 같은 것들이다. 예전 같으면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크게 출렁였겠지만, 이제는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시간이 준 선물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잃은 것도 있다. 무모함, 과감함 같은 것들이다.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2의 인생’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그 말이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졌다. 아직도 할 일이 많고, 아직도 현역인데 왜 벌써 다음을 이야기하나 싶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말이 묘하게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로 다가온다.
제2의 인생이란 꼭 새로운 직업이나 거창한 도전을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다시 바라보고,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선택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35년 동안 ‘일’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온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시간을 어떤 형태로 다시 사용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을 뿐이다.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만약 지금의 내가 처음 입사하던 날의 나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해 줄까. 아마도 “너 생각보다 오래 버틴다”라는 말을 먼저 해 줄 것 같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늘 더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이 항상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예전보다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려고 한다. 성공이라는 단어보다 지속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다가온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35년이라는 숫자는 뒤돌아보면 놀랍고, 앞으로를 생각하면 조금은 두렵다. 하지만 그 두 감정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다.
입사 40년을 맞이하는 날을 상상해 본다. 그날에는 단순히 “오래 다녔다”는 의미를 넘어, “준비해 왔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2의 인생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방향을 잡아온 시간이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때의 자축은 과거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앞으로에 대한 응원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35년은 지나온 시간이고, 40년은 기대하는 미래의 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서 있다. 오늘은 조용히 “오늘도 수고했다”라는 말 한마디를 마음속으로 건넨다. 35년 동안 출근했던 아침들, 쉽게 끝나지 않던 하루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온 나를 말이다. 이 위로가 내일을 살아갈 또 하나의 힘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