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표에 이어 말표와 유동 골뱅이까지 맥주와 기성 브랜드가 만나 협업해 출시한 상품들이 관심을 모은다. 밀가루로 유명한 곰표는 브랜드 정체성에 걸맞게 곰표 맥주를 밀맥주로 내놓았고, 구두약으로 잘 알려진 말표는 색상에서 힌트를 얻은 듯 흑맥주를 출시했다. 그렇다면 술안주로 유명한 유동 골뱅이 상표가 붙은 맥주는 무슨 맛일까. 매콤한 골뱅이무침 안주와 잘 어울리게 비엔나 라거 스타일로 출시했다고 한다. 원래 브랜드가 심어놓은 인상이 강해 서로 잘 연관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부문의 상품에도 자유로운 협업이 이뤄지는 이색 마케팅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국내에서 이 흐름을 연 대표주자로 알려진 브랜드는 곰표다. 이름 그대로 곰을 그린 마크에 ‘곰표’ 두 글자가 큼지막하게 들어간 원래의 밀가루 포대는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인상을 남겼다. 업소용 대형 밀가루 포대에 찍힌 곰표 이미지는 과거의 클래식한 디자인이 다시 주목받는 복고 흐름과 함께 개성 있는 브랜드라는 느낌도 함께 줬다. 게다가 녹색과 노란색이 대비된 브랜드 고유색상과 나름의 서체는 색다른 의외성이 필요한 패션 분야와도 잘 어울렸다. ‘컬래버레이션’이라 불리는 서로 다른 영역 간 협업이 곰표를 붙인 패딩점퍼에서 시작된 것도, 맥주를 비롯해 치약과 팝콘 등 뜬금없어 보이는 상품에 붙인 곰표가 인기를 얻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여러 기업이 브랜드의 고정된 인상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 새로움을 더하려고 시도한다. 원래의 주력 업종 안에서 신상품 출시와 함께 변화를 주기도 하고, 곰표·말표 등의 예처럼 이미 구축된 전통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다른 분야에서 끌어와 색다른 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시도를 한 선구적인 브랜드 하나를 꼽자면 ‘존 디어(John Deere)’가 있다. 펄쩍 뛰어오르는 사슴을 그린 상표로 유명한 미국의 세계 최대 농기계 제조업체 디어앤컴퍼니의 대표 브랜드다.
존 디어 브랜드는 창업자 존 디어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다. 대장장이였던 존 디어가 1837년 강철로 만든 쟁기를 개발하면서 시작된 이 브랜드의 역사는 이듬해 창업자의 이름을 딴 회사가 설립된 뒤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창업 초기 쟁기를 비롯해 써레, 농업용 드릴, 마차 등을 주력상품으로 팔며 미국의 남북전쟁 전후 폭증하는 농기구 수요로 크게 성장하던 이 회사는 1876년 처음으로 사슴이 도약하는 로고를 공식상표로 채택했다. 1888년에는 증기기관 트랙터를, 1918년에는 지금의 존 디어를 상징하는 녹색과 황색으로 도색된 휘발유 트랙터를 판매하기 시작하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존 디어의 브랜드 정체성은 확립되기에 이른다.
상표가 만들어진 역사만 해도 150년에 가까운 이 브랜드가 국내에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최근 인기를 끄는 곰표의 경우와 비슷했다. 2010년대 초 존 디어의 ‘뛰는 사슴’ 상표를 단 패션상품들을 입은 국내 연예인의 모습이 퍼지면서 생각지도 못한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창업자이자 브랜드의 이름인 디어가 사슴을 뜻하는 디어(deer)와 이름이 비슷해서 붙여진, 우리 식으로 따지면 ‘사슴표’라고 하면 될 이 상표는 ‘누구도 디어(사슴)만큼 달릴 수 없어’라는 브랜드 슬로건과 결합해 예상치 못한 인기를 끌었다. 밝은 원색의 녹색과 노란색의 브랜드 색상 또한 곰표와 우연히도 일치했다.
처음에는 판촉용 기념품으로 사슴 로고가 들어간 야구모자 정도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상품들이 현지인 미국에서부터 인기를 끌었고, 애슈턴 커처와 조지 클루니 같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도 애용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유입된 존 디어 유행도 여기서 비롯됐다. 이에 고무된 존 디어는 각종 의류는 물론 장난감 농기계 등 본업과 무관한 소비재들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존 디어가 직접 운영하는 전자상거래 사이트에는 트랙터나 잔디 예초기 같은 본래 사업 분야와 관련된 부품은 물론이고, 의류와 장난감, 주방용품에서 캠핑용품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에 걸쳐 사슴 로고를 넣은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미국 현지의 생산·유통거점에 마련된 파빌리온, 트랙터·엔진박물관 등은 어린이들도 쉽게 농기계를 조작해보고 미래기술의 수준을 배우는 놀이터 역할까지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존 디어 못지않게 자사 브랜드를 활용한 여러 종류의 잡화를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중장비 전문기업 캐터필러(Caterpillar)와 존 디어가 한때 판매 유통망 구축을 위해 협력한 적도 있다는 사실이다. ‘바퀴 하면 존 디어, 궤도 하면 캐터필러’라는 표현이 있던 1930년대 뜨고 있던 캘리포니아 시장을 넓히기 위해 두 기업은 협력했던 전력이 있다. 1960년대 들어 둘의 협력관계는 단절되고 라이벌 의식이 강화되었다. 경제지 ‘포춘’이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 순위(2020년 기준)에는 캐터필러가 62위, 존 디어는 84위에 올라 있다.
존 디어는 180년이 넘는 역사를 신뢰로 축적해 브랜드 자산을 만들고 또 색다른 방향으로 변용했다는 점에서 브랜드 교과서의 한 장을 채울 만하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크고 든든한 미국 농업시장 규모만이 존 디어를 버티게 해줬다고 볼 수는 없다. 제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은 경험이 있는 이 브랜드는 대외적 요인에 흔들리기도 하고, 후발주자에 밀려 매출이 급락하기도 하며, 노사관계를 어긋나게 맺어 막대한 손실과 구조조정을 감수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존 디어가 농업기계 분야에서 수위를 놓치지 않는 이유는 쓰라린 교훈을 바탕으로 혁신해야 살아남는다는 점을 배우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존 디어의 미래형 농기계는 장착된 다양한 센서를 통해 수확량과 토질, 경작 이력, 비료 사용량 등 대규모 농사에 필요한 거의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 정보는 존 디어 스마트공장으로 전달된다. 마찬가지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정을 효율화한 생산설비가 갖춰진 덕에 이제 존 디어는 농기계 회사라기보다 농업정보 디지털플랫폼 기업에 가깝게 변모했다. 인공위성과 드론, 사물인터넷 등 여러 단계의 데이터 수집 장비를 가동해 농장에서나 공장에서나 사람 없이 공학과 데이터가 시시각각 최적화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시대로 넘어가도록 혁신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참조 : 존 디어 사(社)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참고 자료
그래서 존 디어의 ‘사슴표’ 브랜드가 한편으로 차가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다. 무인화 추세가 존 디어를 통해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니고, 이들의 혁신이 인간을 배제하려는 음모에 기댄 것도 아니지만 때로는 시장을 좌우하는 거대기업의 혁신에서 사람 냄새가 빠진 차가운 기운만 감지될 때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색다른 재미를 주는 컬래버레이션과 최첨단 미래기술 사이, 브랜드가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최적의 균형점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