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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McDonald's


리처드&모리스 맥도날드 형제가 샌버나디노에 위치한 최초의 맥도날드 매장 (참조 : 데일리메일)



1954년, 주방용품회사에서 일하던 레이 크록은 전화 한통을 받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버나디노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한 번에 5잔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최신형 믹서기를 8대나 주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즉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리처드와 모리스 맥도날드 형제를 만났다.


동부 뉴햄프셔 출신인 형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장 사업을 하기 위해 1933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그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극장 사업을 했지만 실패하고, 1938년부터 햄버거와 핫도그를 판매하는 매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부터 이른바 ‘스피디 서비스 시스템’이란 이름으로 복잡한 메뉴는 다 없애고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한편 손님이 음식을 직접 가져가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렇게 해서 음식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햄버거 가격은 낮춰 호평을 받았고, 인건비 등의 관리비를 줄이는 효과도 나타났다.


장사가 잘 되자 맥도날드 형제는 이후 여러개의 프랜차이즈 매장을 개설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들이 직접 운영하는 매장을 제외하곤 큰 이익을 내지 못했다. 지점을 운영하는 사업자들이 프랜차이즈의 개념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맥도날드 형제 또한 프랜차이즈 사업 확장에 큰 관심이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먼드 A 크록 (사진 : 비즈니스 인사이더)

세계에 약 3만7000개 매장 운영


맥도날드가 몇군데만 손을 보면 장차 ‘대박’을 치겠다고 예감한 크록은 형제를 설득했다. 매장 이름과 메뉴, 구조, 운영방식 그리고 금색의 아치 모양 상표까지 모두 맥도날드 형제가 쓰는 것을 그대로 쓴다는 조건으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형태의 사업을 제안했다. 그 결과 1955년 지금의 맥도날드, 그리고 당시 레이 크록이 ‘공식 1호점’이라고 이름 붙인 매장이 시카고 디플레인스 지역에 문을 열었다. 이때 크록의 나이는 53세였다.

한국 압구정 1호 맥도날드 매장 (사진 동아일보DB)

이후 맥도날드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60년 미국 내 지점수는 200개를 돌파했고, 1963년에는 오늘날 맥도날드를 상징하는 로널드 캐릭터도 개발했다. 또한 1967년에 드디어 첫 번째 해외매장을 캐나다와 푸에르토리코에 열었고, 1976년 창업 20년 만에 총수익 10억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대 들어선 전 세계 1만개 매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맥도날드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크록이 1984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든 이후부터 맥도날드가 더욱 큰 성공가도를 달렸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20세기 미국인의 생활방식에 기여한 50명을 다룬 남성잡집 에스콰이어의 표지와 그 기사 내용 (사진 : 에스콰이어클래식)



크록이 별세한 해, 미국의 잡지 ‘에스콰이어’는 20세기 미국인의 생활방식에 기여한 50명 중 1명으로 크록을 선정하면서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가 이룩한 맥도날드 시스템이라는 프랜차이즈가 미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패스트푸드 문화를 표준화한 업적을 호평한 것이다.


오늘날 맥도날드는 전 세계에 약 3만7000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매장에서 하루에 맞는 손님수는 무려 7000만명에 이른다.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인 인터브랜드가 발표하는 ‘글로벌 브랜드 100’에서도 맥도날드는 매년 10위권에 오르는 등 브랜드 가치도 상당하다. 그렇다면 맥도날드는 어떻게 세계 최고의 프랜차이즈 기업이 되었을까?


무엇보다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크록은 맥도날드 1호점을 개설하면서 매일 매장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그는 직접 청소하고 음식을 관리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의 매뉴얼을 정립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맥도날드의 핵심가치인 ‘QSC&V(품질·서비스·청결·가치)’를 만들었다. 그는 “더 효율적인 판매 방법, 더 신속한 서비스, 더 청결한 장소로도 이길 수 없다면 차라리 당장 이 사업을 그만둬라” 역설하면서 이런 기본적인 가치들이 결국 소비자의 구매 기준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핵심가치를 기반으로 맥도날드는 외식업계 최초로 표준화·단순화·전문화라는 3대 시스템을 일구며 일대 혁신을 이뤘다.

맥도날드의 비즈니스 미션 : 세 다리 의자 

또한 크록은 ‘세다리 의자’라고 불리는 맥도날드 본사와 프랜차이즈 사업자, 협력업체의 공생관계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맥도날드는 프랜차이즈 사업자에게 장기적인 가맹계약, 레스토랑 경영 커리큘럼, 본사 차원에서의 경영지원 및 마케팅, 전문 컨설턴트의 재무교육 설계 등을 제공한다. 사업자가 매장을 운영하는 데만 포커스를 맞출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협력업체는 현지에서 검증된 공급자를 우선 선택하고 그들이 본사 대신 식자재 및 설비 공급을 진행하게끔 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자와 협력업체라는 두개의 다리가 맥도날드라는 한개의 다리를 만나 보다 견고한 의자를 만들어주는 상생의 원리가 바로 맥도날드의 성공방정식인 셈이다.




이러한 철학은 1961년 햄버거대학을 개설한 데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30여명의 교수진을 갖춘 햄버거대학은 맥도날드의 관리자, 매장 영업 매니저, 프랜차이즈 사업자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QSC&V’에 기반을 둔 노하우를 전수했다. 맥도날드는 햄버거대학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전과 철학을 공유했고, 세계 모든 맥도날드 매장이 동일한 맛과 서비스, 청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맥도날드 형제, 크록에게 매장 넘겨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점이 남아 있을 듯하다. 맥도날드 형제는 어떻게 되었을지에 관해서 말이다. 크록의 공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전략 때문에 형제와 의견이 달라져 불화도 발생했고, 크록이 부동산 회사를 통해 맥도날드를 장악하려 한 복잡한 내막도 있었다.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1961년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에게 270만달러를 주고 맥도날드의 모든 판권을 매입했다. 세금을 제하고 나면 형제가 각자 100만달러씩 손에 쥔 셈이다. 사실 맥도날드 형제는 50세 이전까지 햄버거를 팔아서 100만달러를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 형 모리스가 크록과 같은 1902년생이고, 동생 리처드는 1909년생임을 감안하면 형제가 모두 60
세가 되기 전에 백만장자 반열에 오른 셈이었다. 그리고 크록 역시 그들에게서 과감하게 회사를 매입함으로써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더욱 견고한 회사를 만들 수 있었을 테니, 어쩌면 역사의 흐름이 크록의 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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