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탄사스의 Villa EncantoⅡ에는 두 명의 빅토르가 산다. 한 빅토르는 왜소하다. 다른 빅토르는 큼지막하다. 한 빅토르는 노년이고 다른 빅토르는 장년이다. 한 빅토르가 장난꾸러기라면, 다른 빅토르는 호쾌한 느낌이다. 많은 것이 다른 둘은 한 명은 한국인-한국인의 이민 2세대이고 다른 한 명은 한국인-쿠바인의 이민 3세대다.
빅토르 호 디아즈는 이민 3세대이다.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한다. 이 기억의 형태는 지식이다. 그는 자신의 삶 밖에 있을 선조들의 삶을 기억한다. “선조들은 1921년에 마니티 항구에 도착했다. 사탕수수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사탕수수 값이 폭락하면서 사라졌다. 이들은 살아가야했기에 마탄사스의 에네켄 농장 일자리를 찾아갔다. 이후 엘 볼로 농장에서 한인들은 집성촌을 이루면서 쿠바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것이 그와 인터뷰를 했을 때 가장 처음 들려줬던 이야기다.
빅토르 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빅토르 호에게 한인학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3·4살 때 배운 것이라 기억나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한인 학교 교육을 받지 않은 빅토르 호 디아즈와 함께 한국 문화를 배운다. 돌려진 그 시간만큼 긴 시간들이 흘렀다. 겹겹의 기억들이 풀어진 그에게서 많은 것들이 씻겨나갔다. 그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빅토르 호는 몇몇 단어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호근덕은 밥시간이 되면 “이리와”라고 늦둥이 빅토르 호를 불러 말했다. “밥 먹어”. 때때로 “찬물”을 말했다. 이 평범한 식사 대화의 기억은 뇌가 아니라 밥상머리에 매여있었다.
이런 기억들은 좌표를 갖고 있다. 그런 기억들은 뇌가 아니라 그 좌표에 있기에 잊어버릴 수 없다. 빅토르 호는 옥상에서 마탄사스의 이곳저곳을 알려줬다. 대개 빅토르가 기억하는 중요한 장소들이었다.
장소들은 기억을 고정시킨다.인터뷰를 이후 우리에게 안내해준 핀카 엘 볼로에는 빅토르 호의 어린 시절이 있다. 그때의 모습과 지금은 많이 다를 것이다. 옛날 한인들이 살던 곳에는 이제 쿠바 현지인들이 살고 있다. 마탄사스 지방회와 민성국어학교의 건물은 그대로지만 내부는 가정집이 되었다. 그러나 빅토르 호는 지금이 아닌 그때에 있기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때문에 건물들을 가리키는 그의 손은 거침이 없다.
일시적인 감각은 금방 사라지지만, 몇 번의 반복을 거치면 해마로, 전두엽에 저장된다. 이 과정은 뇌 혼자만의 과정이다. 그러니 뇌의 기억들은 홀로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완전한 기억,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위해서는 삶의 좌표과 몸의 도움이 필요하다. 두 과정을 통해 기억은 경화된다. 하루에도 3천억 개의 세포는 죽고 태어난다.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가 아닐 것이다. 나와 기억을 같이 했던 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달라진 두 존재들을 원래의 존재로 이어주는 것은 그런 경화된 기억이다.
빅토르 호와 빅토르 호 디아즈에게 오랫동안 한국적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이유를 물었더니, “전통보다는 습관과 생활”이라고 말했다. 생활이 단단하게 받혀주는 기억은 매일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내가 나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든다. 매일 사라지는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는 장소에서 전병을 먹고, 연장자가 먼저 숟가락을 들기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남아있다.
그날 밤, 빅토르 호는 사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편지에는 오늘 있었던 일들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편지의 말미에는 "No las olvidamos" 라고 적혀있었다. 직역하면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다.
빅토르 호는 아침마다 마스크를 내리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발음은 또박거렸고, 목소리는 약간 앵소리가 났다. 우리도 인사를 하면 웃어줬는데, 그럴 때마다 이빨을 다 보이면서 웃었다. 가끔씩 낄낄 소리를 내실 때도 있었다. 그러고는 낡은 일회용 마스크를 쓰고 파파야를 잘라주러 내려갔다. 이제 나는 파파야를 보면 그것이 기억이 난다.
빅토르 호와 빅토르 호 디아즈는 올해 5월, 다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영주권을 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 일은 좌표가 되어 이들을 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