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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기행 #3

- 김소영: 유배인의 노도

by 문장강화
장소로부터 도망치며 어쩔 수 없이 장소로 드는 죽음, 습속으로부터 계속하여 떠나가며 그 습속 속에서 죽는 죽음(⋯중략⋯) 세상으로부터 떠나며 세상에 돌아오는 죽음, 이런 병맥은 진맥키 어려운 듯하다. 비극은 어쩌면 황폐를 꿈꾸는 데에서부터 싹트는지도 모른다. 이런 불모에의 집념은 어쩌면 산다는 일을 고통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97.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추측되는 노도는 육지와 불과 5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 스스로 "아득한 섬들은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건너에 있고/방장산과 봉래산에 못지않은 절승이 가까이 있도다/(⋯중략⋯)/남들은 나를 보고 신선이라 하겠구나"라 표현할 만큼 바다와 산은 제각기의 푸름을 드러낸다.
마을 가운데에는 산이 있다. 높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다. 산세도 험하지 않아 편히 올라갈 수 있다. 그 산 중턱을 올라가다 고개를 돌리면 한려수도의 귀퉁이가 수평선에 걸쳐있다. 그즈음에 김만중의 허묘가 있다.

김만중 허묘

허묘는 그 앞에 있는 대리석 표지가 아니었다면 그저 돌무더기로만 보였을 테다. 좀 더 옛날에는 돌무더기도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오직 노도 청년회의소가 세운 표지뿐이었다. 표지에 따르면 숙종 19년 4월부터 9월까지만 그의 육신은 존재했다. 이후부터는 후손들이 그의 육신을 육지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5개월간의 짧은 시간 동안 노도 사람들은 그 묘지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노지나묏등'이 그것이다. 옛날 어느 노인이 노도 큰골을 찾아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방안에 있으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나오면 산등성이에 올라와 바다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어 마을 주민들 이 '노자묵고(놀고먹는) 할배'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이 노인이 병들어 죽자 큰골 산등성이에 묻어주고 이곳을 노지나묏'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도 존재한다. 노도와 벽련마을 사이의 물길이 가장 가까운 곳에 '망노대(望棺臺)가 있다. 전화나 전기가 없던 시절 최근까지 이 곳에서 큰 소리로 “아무개야! 배 타고 오너라" 하고 고함치면서 육성으로 통신을 했던 곳이다. 옛날에 큰 양반이 노도를 건너야 하는데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이 일어 노 젓는 배는 올 수가 없었고, 온다 한들 파도 대문에 배를 접안할 수 없는 상황이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망노대'라 불렀다고 한다.
(미상, "남해문화원 구전설화 11", 《남해신문》, 2015.10.23, <http://www.namhae.tv/news/articleView.html?idxno=27073>)

인간은 공간에 덩그러니 있다고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세계와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장소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특정 장소나 위치에 묶여 있다"라는 제프 말피스의 말따나 장소는 정체성을 만든다. 우리가 장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에서 행동하고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즉,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만중이 직접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

김만중이 생활인이 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초옥터 근처에 있는 직접 팠다는 우물이 그의 노력을 증명해준다. 물이 있어야 생명은 지속될 수 있다. 우물은 생활인의 것이다. 그가 판 우물은 수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모습을 유지하며 물을 뿜는다. 우물이 보여주는 견고함, 그리고 지속성은 그가 얼마나 이곳에 뿌리내리고 싶어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만중은 죽을 때까지 유배인이었다. 그 공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서 유배의 무서움은 드러난다. 김만중은 노도를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것이 김만중을 천천히 죽게 만들었다. 이를 반증하듯 노도의 생활인들은 김만중의 슬픔을 알았지만-망노대 설화-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노지나묏등-. 생활인에게 "노자묵고 할배"는 가끔 한숨 쉬는 한가한 큰골 노인네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김만중을 끝까지 유배객으로 만든 것은 임금의 명이 아니라 자신의 태도였다.

네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진하여 돌아오니 내 새삼 무슨 간여할 바 있으리오? 또 네 말을 들은즉, "꿈과 세상을 나누어 둘이라"하니, 이는 아직도 네가 꿈을 깨지 못하였느니라. 옛날에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가, 다시 나비가 장주로 화하니 어떤 것이 참인가를 분별치 못하였다 하니 어제의 성진과 소유 있어 어느 것이 참이며, 어느 것이 허망한 꿈이뇨?
김만중, 《구운몽》, 보성출판사, 1996.


《구운몽》은 세속적 욕망(꿈)-초월(현실)과 같은 양극단에 대해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확실하게 말한 것은 스스로를 정진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성진은 정진이 가능했다. 번뇌에서 벗어나 삶의 태도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만중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계속 고민했다. 바다 건너 자신이 있었던 자리로 돌아갈 용기도, 생활인이 될 비위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를 영원히 노도 밖 바다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양지바른 곳에서 육지를 향해 있던 허묘는 이를 증명하듯 존재한다.


유배는 유람이 아니다. 단순한 명제지만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랬다. 그러나 김만중이 남겨둔 생의 흔적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노도는 '김만중 문학의 장소'가 아니라 '김만중이 겪어야 했던 생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협할 수 없는 두 지향점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던 그는 결국 유배인이 됐다. 그리고 그 자신을 태운 고민은 그의 문학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지금도 이곳 저곳을 자유롭게 떠돌아 다닌다. 이 모순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도의 물결은 으레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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