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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matic Dec 15. 2020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시대의 공기를 환기시키는 방식

 햇볕이 옅게 감도는 여름날의 거리에 유유자적한 움직임들이 서성인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에 눈길을 보내기도, 들려오는 일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딴청을 피우기도 하던 중 저 멀리서 자전거를 탄 소년과 중년의 남자가 다가온다. 카메라는 대로의 끝 한 편에 위치해 어떠한 구도의 변화도 없이 둘의 이동을 가만히 응시한다. 소년 샤오쓰(장첸)와 그의 아버지(장구주)는 학교에서 샤오쓰가 국어 성적으로 인해 야간부로 옮기게 되었다는 선생님의 전언을 듣고 돌아가는 길이다. 여느 날에도 고요하게 있을 것만 같은 타이베이의 거리는 서사 상으로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음에도 오랫동안 우리의 눈앞에 머무른다. 서사적 긴장으로 메워져 있지 않은 거리에는 오롯이 여름날의 나른한 공기와 유유한 일상만이 감돌고 있다. 앞서 언급한 장면은 시작점에 위치해 이 영화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감각하게 될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여백에서 공간의 정취를 불러오며, 고여 있는 물웅덩이에 비친 상을 마주하듯 스크린을 통해 1960년대 대만의 시대상을 마주하게 한다.


슬라이를 향한 217파 아이들의 폭력이 가해지는 장면

 에드워드 양은 프레임의 ‘비워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여백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공간성의 레이어를 겹친다. 공터에서 슬라이를 향한 217파 아이들의 폭력이 행해질 때, 액션이 이뤄지는 곳은 프레임 상단 구석에 위치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내지 않는 것에 더 가깝다. 엄밀히 말해 우리의 시야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은 인물들의 액션이 아닌 그윽한 적막에 휩싸인 공터다. 유난히 더욱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연출이 아이들의 폭력을 미화한다는 성급한 해석을 내놓는다면 명백히 아닐 것이다. 다 자라지 못한 아이들의 냉혹한 폭력의 상황은 상충되는 평화로운 적막의 고요와 만나 더 비정하게 다가온다. 비워진 공간의 적막함은 시대의 무심함이자 방관에 자리를 내어준다.


 에드워드 양이 여타의 영화와 액션을 담는 방식의 차이는 217파를 처단할 때 뒤늦게 당도한 217파의 일부 무리를 소탕하는 장면에서도 보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폭력 조직이 등장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액션을 카메라가 시종일관 따라붙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고정되어 액션이 벌어지는 상황을 둔중한 시선으로 주시할 뿐이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액션이 줄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을 버리는 대신 관객을 객관적 관찰자의 위치에 두고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수동의 자리에 고정시킴으로써 상황에서 나아가 맥락, 시대를 바라보게 한다.          


촬영장에서 손전등으로 밍을 비추는 샤오쓰

 영화 속 개인의 일상도 시대와 떨어져 있지 않다. 인물 개인의 삶은 당시 시대적 맥락의 영향 아래 봉합되어 있다. 인물 설정 역시 시대로 귀결되는 상징적 함의를 지닌다고 유추해볼 때, 샤오쓰가 가진 시력의 결함도 의미심장하다. 늦은 밤 샤오쓰는 집을 밝히는 전구 불을 켰다가 끄기를 반복한다. 샤오쓰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엄마(금연령)의 물음에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의 약해진 시력은 빛과 어둠이라는 명확히 상충되는 것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이 장면은 표면상으로 시력의 결함을 가진 샤오쓰에게 충분히 일어날 법한 개인의 일상으로 보인다.

반복해서 나오는 전구 이미지
샤오쓰가 다시 촬영장에 되돌려 놓아 둔 손전등

 그러나 이면의 함의에는 인물 설정에 ‘빛과 어둠’이라는 영화의 상징적 주제의 주축을 녹아 내어 시대를 적확하게 짚는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밤 장면으로 수없이 점철되어 있다. 어둠 속에서 빛이 주어진다 한들 그 빛은 점멸하는 불안한 빛으로 존재할 뿐이다(학교 복도에서 빛의 점멸, 217파 소굴에서 정전, 손전등의 점멸 등). 당시 대만은 빛과 어둠이 혼재되어 있고, 엄혹한 국민당 집권 체제 안에서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나아가 권리조차 결여되어 있다. 본토인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외성인의 부모 세대들은 자식들에게 희망을 걸지만, 학생들은 샤오쓰와 갱단을 조직한 소년들, 이성과 진실한 감정을 나눌 수 없는 밍과 샤오추이처럼 방황한다. 당시의 부모들은 샤오쓰의 부모처럼 막내 딸아이의 옷에 단추를 달아주지 못하고, 늦은 밤 집을 나서서 배회하는 둘째 아들의 방황을 감지하지 못하며, 샤오쓰의 안경을 사주지 않은 것처럼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낙담하는 샤오쓰의 말에 엄마는 일찍 자면 괜찮을 거란 무의미한 응답만 할 뿐이다. 샤오쓰가 촬영장에서 훔친 손전등은 빛과 어둠을 구별하지 못하는 샤오쓰에게 주어진들 비극을 맞이하는 결말의 전조에 그칠 뿐이다.   

      

촬영장에서 연기하는 밍

 샤오쓰가 분신과도 같은 손전등을 지닌 채 진실을 찾아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면, 밍(양정이)은 세상을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여 저항하는 대신 현실과 결탁하는 쪽을 택한다. 샤오쓰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불안 속에서 헤매며 세상을 오인하는 것에 더 가깝다. 밍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만 현실을 너머선 것은 바라지 않는다. 밍에게 현실은 진실한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 냉혹한 세계다. 밍이 촬영장에서 연기 테스트를 가질 때 다른 요구에도 불구하고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슬픔은 연기를 끝맺음과 동시에 이내 미소로 바뀐다. 밍은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연기를 할 때에는 속 깊은 곳에 두었던 실제 감정을 내비치고, 현실에서는 이내 거짓 웃음을 짓는 아이러니를 드러내 보인다.

샤오쓰의 살해 장면

 밍은 삶을 담보하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해오는 남자들에게 응하지만 진실한 감정은 교류하지 않는다. 희망을 바라지 않았던 밍은 샤오쓰의 서투르게 휘두른 칼에 의해 영원히 죽음으로 박제된다. 샤오쓰와 밍은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이 너무 달랐고, 밍을 끔찍한 현실에서 구원해줄, 샤오쓰를 현실의 오인에서(또 밍을 향한 오인의 감정에서) 밝혀줄 손전등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그 무엇도 그들의 곁에는 없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개별적 상황과 설정은 물결에 일렁이는 파동이 다른 파동으로 이어져 퍼져 나가듯 시대의 연쇄적 고리로 얽혀 있다. 이전 장면에서 비롯된 인물의 대사, 여타의 사운드는 장면 안에서 말끔하게 끝나지 않고, 다음의 장면에도 이어지며 채색한다. 마치 삶의 흐름이 끊이지 않고 연속적이듯이 영화는 이를 따르며 명민하게 (영화의 피할 수 없는) 단절을 흐름 속에 감춘다. 밍과 젊은 의사가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의 음성은 소거되고 다른 인물인 보건 간호사와 학교 교관에게 그들의 빼앗긴 목소리가 양도된다. 뒤이어 밍과 샤오쓰의 대화 역시 음원이 스크린에서 감춰져 있고, 그들의 희미한 상이 맺힌 유리창만 보게 된다. 마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인물들의 일상에서 오가는 사소한 대화가 동시대를 살았던 어느 누군가의 목소리여도 무방하다는 듯이.

 그러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는 날카로운 느낌보다는 흐름의 연속처럼 느껴져 여운을 남기는 감각에 더 가깝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맞물림, 서사와 세세한 인물 설정까지 태피스트리처럼 얽혀 있다. 영화를 따라가며 세세한 감각이 중첩되고 겹겹이 쌓이며 비로소 장장의 4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감각을 쌓아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관객들은 영화와 함께 호흡한 감각을 온전히 정리할 수 없다. 정리되지 않는 우리의 구멍 난 인상을 메우는 것은 샤오쓰의 덩그러니 남아 흩어져 있는 두 짝의 신발처럼 서글픔을 상기시키며 우리를 끝 모를 비애로 내몰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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