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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을 읽고

by 김뭉탱


두 손 모은 기도나 가부좌 튼 명상처럼 영혼은 침묵에 깃든다. 만약 공허감이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면, 소란스러운 육체로 깃들지 못한 영혼의 부재일지 모른다.


한편, 예술도 마찬가지로 영혼이 깃드는 하나의 형상으로 취급된다. 침묵이 영혼을 이끈다면, 예술 또한 침묵을 기반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고요한 것이 가장 예술적일까? 가장 고요한 것. 인간의 오감 중 가장 고요한 후각을 대입해 보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오히려 후각의 과도한 침묵은 예술로 표현되지 못한다. 상징계에 닿지 못하는 후각의 침묵은, 영혼과 너무 단단히 묶여 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된장찌개 냄새나 옛 연인의 체취는 아무리 노력해도 언어라는 그물로 낚아 타인에게 건넬 수 없는 -침묵- 그 자체다. 향은 그저 나를 나 자신과 연결시킬 뿐. 그렇기에 장 그르니에는 후각이 예술 작품을 낳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후각은 타인이 끼어들 여백만 없을 뿐, 분명 영혼의 안식을 되찾는데 도움을 준다. 종교적 행사에서 향이 쓰이는 이유도 영혼을 마주하기 위함이며, 자동차 방향제, 아로마, 섬유 유연제 등의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까닭도, 잠시나마 자신의 영혼과 연결되기 위한 현대인의 발버둥일지 모른다.


아마 철학과 수학이 아닌, 시가 예술로 분류되는 까닭은 침묵이라는 반석 위에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더했기 때문 아닐까. 그 여백은 시, 미술, 음악이라는 형태를 띄기도 하며, 환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할 수 있는 빈틈을 창출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혼의 빈곤함을 느낄 때 스스로 침묵하거나, 안식된 향을 찾거나, 혹은 예술을 향유하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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