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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사랑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을 읽고

by 김뭉탱


우리는 무엇을 정의할 때 그것이 갖고 있는 속성을 열거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러나 사랑, 우정과 같은 복합적 관념은 대상을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무엇은 사랑이 아니다'와 같은 소극적 정의가 더욱 용이할 때도 있다. 같은 이유로 프롬 또한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설명하기보다 '무엇이 성숙한 사랑이 아닌지' 혹은 '성숙한 사랑을 위한 기술은 무엇인지'에 더욱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이에 나는 프롬이 남긴 단서들을 따라 성숙한 사랑이 무엇인지 탐구해보려 한다.


프롬은 성숙한 사랑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으로 명상을 꼽았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명상을 통한 '자아의 내려놓음'은 반대로 '개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자아란 사회, 문화, 종교의 영향하에 주조되는 심리적 산물이며, 프롬에 따르면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미성숙한 사랑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책 전반에 걸쳐 자본주의 시장 상품, 동일성의 원리, 가족이나 종교의 영향에 따른 자아를 언급하는 이유도 '이것들은 성숙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소극적 정의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반면에 개성은 무의식까지 전체 정신으로 통합된 자기 원형으로, 동시대 인물인 칼 융의 '개성화'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의 강화, 즉 개성화란 '개인의 인생은 미분화된 전체성의 상태에서 시작되며, 씨앗이 식물로 성장하는 것처럼 개인은 점차 분화하여 충분히 균형 잡히고 통일된 인격으로 발달한다'는 것으로 총 세 단계를 이루고 있다. 그 마지막 단계-자기 원형과의 만남-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단순 명료한 논리가 아니고, 남과 다른 면도 있고 동시에 같은 면도 있으며,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이기도 한 "대극의 일치"이다. 고정적 자아를 벗어나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극(여성-남성, 빛-어둠, 의식-무의식, 모순, 역설)의 통합을 뜻하는 자기 원형과의 만남은 모순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으며, 이것은 성숙한 단계에서 내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합한다는 프롬의 말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자아의 비움과 개성의 강화는 성숙한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프롬에 따르면 사랑이란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즉, 성숙한 사랑이란 세계 전체에 대한 성숙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가 자아도취를 성숙한 사랑의 걸림돌로 비유한 이유도 세계 전체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겸손, 주는 기쁨, 명상 등을 통해 자아를 비워냄으로써 세계 전체에 대한 열린 존재로 향할 수 있다. 이처럼 '태도'가 자아를 비우고 존재를 여는 방식이라면, '성격의 방향'은 통일된 인격으로 개성이 발달하는 것으로 '개성화' 혹은 '자기 자신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와 석가 모두 자아를 내려놓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실현했다.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사랑을 직접 정의할 수 없었던 이유도 '성격의 방향'은 예수와 석가처럼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아가 언제나 내려놓아야 할 짐이며, 개성은 발달시켜야만 하는 목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발달 단계는 필수적으로 자아의 확장 혹은 상호작용이 이뤄져야 하며, 개성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이룰 수 있다. 이처럼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개성의 발달, 서로 다른 성격의 방향, 현실과 떨어질 수 없는 자아 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묘사를 모으다 보면 우리는 어렴풋이 자아와 개성,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형태를 느낄 수 있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사랑은 언제나 에고를 녹여버린다. 사랑을 하면 에고가 사라진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짧은 순간이나마 진정한 사랑을 할 때가 있고, 그 순간 우리의 자아는 사라진다. 즉, 에고가 사라진다.
-오쇼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하는 존재와 사랑받는 존재 사이에 아무런 사회적, 문화적 사물이 끼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에바 일루즈 [감정 자본주의]


사랑은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일 수 있으며,


사랑은 내가 생산적 정향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양상이다. 즉 인간이 자기 동료,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과의 사이에 가지는 적극적 창조적 관계다. (…) 사랑은 자신의 통합감과 독립감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 모든 인류, 자연과의 결합을 경험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다만 빛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휴버트 드레이퍼슨, 숀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사랑은 세계 전체를 향해 존재를 여는 경험일 수 있으나,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한다는 것, 사랑을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집어넣는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념화된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다. (...)이 논의를 노자는 [도덕경]의 첫 줄에 이렇게 표현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도올 김용옥 [노자가 옳았다]


내가 깨달은 최고의 생각이란 이런 거야.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 있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결국 사랑은 언어로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뇌과학에서 밝혀진바, 인간은 언어 안에서만 자아를 구성하며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언어 없이 자아가 없다면, 자아 없이 언어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아를 녹이는 사랑의 속성은 언어를 넘어서는 무언가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리히 프롬이 소개한 '사랑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술들, 그리고 성숙한 사랑이 아닌 본보기들'은 <자아가 사라지고, 세계와 통합되며, 자기 자신을 실현시킨다>는 모두 같은 의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견고한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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