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비되는 재난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를 읽고

by 김뭉탱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왜 재난뉴스에 끌리는지를 비극에 관한 인간의 심리를 통해 설명한다. 비극작품은 관객이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잘못과 범죄를 지켜보고 나서 '나 역시 너무나 쉽게 똑같은 짓을 저질렀을 거야'라는 소름 끼치는 결론 말고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진정한 도덕을 일깨우고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비극작품 같이 재난뉴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재난이 언제든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임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도덕성, 공감성을 확인해 보며 죽음을 직시하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알랭 드 보통 외에 다른 사람들은 재난 뉴스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이에 수전 손택과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소개한다.



수전 손택은 사람들이 폭력이나 잔혹함 등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잔혹한 이미지들 앞에서 매번 타인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며,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게 된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실제로 우리는 세계적으로 매일매일 반복되는 전쟁, 내전들을 접하며 점점 그 참상에 정통(익숙)해지고, 진지한 관심을 쏟을 만한 심적 에너지를 잃게 된다. 물론 가끔 진지한 관심을 쏟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연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수전 손택은 여기서도 물러서지 않고 날 선 비판을 이어간다.

혹은 재난 뉴스를 접할 때 느끼는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된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단순한 연민은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손쓸 방법이 없었다'라는 무능력함과, '나는 그 사건과 관계가 없다'라는 무고함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손택. 그녀는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손쓸 방법이 없다'라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나는 그 사건과 관계가 없다'라는 무고함을 끝까지 추적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과연 손택이 말하는 재난 뉴스를 접하는 방식이 무엇일까.


%EB%8B%A4%EC%9A%B4%EB%A1%9C%EB%93%9C.jpeg-12.jpg?type=w1600

이 사진은 2015년 9월 터키 해안으로 떠내려온 난민 아이의 시신이다.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보통은 참담하고 잔혹한 현실에 분개하거나 깊은 슬픔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손택에 따른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 집단은 많은 이미지와 뉴스가 쏟아지는 상황에 순응하여 이 또한 지나가는 이미지로 인식할 것이다. 물론 순간의 비애감은 들지만, 순간의 감정을 넘어서는 행동이나 사고는 촉발되지 않는다. 아마 이런 태도가 손택이 말한 타인의 고통을 '스펙타클로 소비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집단은 조금 더 의지를 가지고 해당 사건에 관심을 가져볼 것이다. 약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이 아이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배가 왜 침몰한 것인지 등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것이다. 그러나 난민이라는 키워드가 세계적 규모로 일어나는 너무 광범위하고 내가 개입할 수 없다는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인식되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질 것이다. 어떠한 문제든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그저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 댈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그 연민은 손택의 말처럼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세 번째 집단은 단순히 이 사건의 상황만을 파악하거나 연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문제를 고찰함과 동시에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 사건의 근저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깔려 있다.

유럽이 난민을 수용하는 법은 꽤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난민은 항공편이나 선박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다른 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테러로 인해 새로운 법이 개정되게 된다. 항공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난민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갑작스럽게 난민 처지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은 충분한 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편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정원을 훌쩍 넘는 조악한 배를 탈 수밖에 없었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배는 침몰하고 만다.

이에 나는 과연 이 아이의 죽음에 일말의 연결 지점도 없을까? 테러로 인해 새로운 난민 법이 제정되었다면, 나는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테러와 정말 무관할까? 중동 지역에 정치-경제적으로 개입하는 미국에 대해 방관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난민에 대해 성 범죄자,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퍼트리는데 일조한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난민 관련 법률은 무엇이며, 내가 투표했던-지지하는 정당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사진에 담긴 광경을 일으킨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 일을 용서할 수 있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던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나와 접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수전 손택이 전하는 삶의 태도는 구도자와 비슷한 경지를 요구한다. 우리가 매 순간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녀의 말은 소크라테스의 등에처럼 분명 우리의 각성을 촉구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대중매체 및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이라는 비판적인 개념으로 바라본다. 예를 들어 그는 간단하고 중독성 있는 대중음악이란, 청취자들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다음에 이어질 음이나 멜로디를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 정신적 노력이나 긴장을 배제한다고 주장한다.

가벼운 음악에서는 이미 단련된 귀로 인기 가요의 처음 몇 마디만 들어도 노래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질 때에야 비로소 행복감을 느낀다.
-신혜경 [벤야민 & 아도르노 :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문화산업의 산물은 항시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에 대해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함으로써 수용자의 적극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위축시킨다
-신혜경 [벤야민 & 아도르노 :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이처럼 우리는 뉴스에서도 동일하고 반복되는 정보를 경험한다. 정치권 다툼, 전쟁, 경제 위기 등 반복되는 소식은 반성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며 그저, 슬픈 뉴스를 보면 슬퍼하고, 분한 뉴스를 보면 분노하게 된다.

문화산업의 산물들은 모든 정신적 노력과 긴장을 배제하도록 하는 구조, 그래서 결국은 대상에 대한 자동적인 반응을 낳는 구조로 되어있다. 수용자는 자신의 독자적인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되며, 문화산업의 생산자들이 수용자의 모든 반응을 미리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은 반복성과 자기 동일성,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는 편재성으로 말미암아 수용자에게 기계적인 자동적 반응을 일으킨다.
-신혜경 [벤야민 & 아도르노 :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아마 아도르노는 재난 뉴스를 보고 분노와 연민이라는 미리 규정된 반응만 보이는 현대인을 상상력과 반성이 마비된 정신적 불구라고 보지 않았을까.



어쨌든 잔인한 뉴스가 비극 작품처럼 개인의 도덕을 일깨우고 발전시킨다고 말한 알랭 드 보통과 달리 수잔 손택과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꽤나 비판적 시작을 보여준다. 나 또한 재난 뉴스를 보면 죽음을 상기하여 현재의 삶을 재고하기도 하지만, 기계처럼 슬픔과 연민만 보내고선 생각을 멈추기도 한다. 무엇이 더 좋은 태도인지는 각자의 상황에 달려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에겐 잠시 멈추어 생각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에 어떤 공백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문명인이라고 생각했던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한 번쯤 품을 들여 재난에 관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keyword
구독자
작가의 이전글성숙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