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과 곡선, 그리고 원과 점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이미지들이 있다. 햇볕 냄새가 나는 이불, 풀 잎에 맺힌 이슬,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불꽃같은 사랑,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는 무언가.
영원에 대한 끌림은 인간 본성이라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발견된다. 시체를 온전히 보관하려 했던 이집트 문명, 영원 불변하는 표상을 떠올렸던 플라톤,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인간은 영원을 갈망해 왔다. 이처럼 나 또한 어렴풋이 영원에 대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순식간에 많은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상황에서 영원이란, 영원한 사랑처럼 내뱉기도 민망한 굳은 표현에서만 들려올 뿐이다. 영원이란 그저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무언가이거나, 입 밖으로 뱉으면 오히려 진실성이 퇴색되는 빛 좋은 개살구 취급을 받는다.
만약 영원이라는 단어를 단순한 이미지로 만든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한히 뻗은 직선이다. 기독교의 선형적인 세계관이나 인류는 발전하고 있다는 역사관, 혹은 빽빽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있는 스케줄처럼 시간은 선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영원이라는 단어를 음미하다 보면 다른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무성했던 초목들이 가을에 고개를 떨구지만 봄에 다시 움트듯, 혹은 지구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오랫동안 태양 주위를 돌듯 영원은 직선이 아닌 곡선-원의 모양을 닮았다. 마치 '영원'이라는 글자 모양새에 유독 동그라미가 많은 것처럼, 직선이 아닌 곡선의 형태가 더 마음에 와닿는다. 어쩌면 사계절이 뚜렷해 영원이란, 변화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던 우리나라의 정조(情調)가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똑같은 원의 모양이지만 꽃이 피고 지는 생기 있는 영원이 아닌, 굳은 밀가루 반죽처럼 바스러지는 영원도 떠오른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태어나고 죽는다는 무분별한 이미지로 치환되어, 그 압도적인 스케일 속에 모든 것이 빛을 잃어버린 모양새다. 이렇게 만물이 태어나고 죽는다는 단순한 이미지에 잠겨 내 삶이 티끌보다 못한 것으로 전락한다면, 이제 영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시간이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영원이 아닌 지금에 집중한다. 옷과 휴대폰을 가지런히 벗어 욕실로 향한다. 화장실 타일에 잠시 발바닥이 차갑지만 이내 따듯해질 것을 알아 개의치 않는다. 샤워수전을 왼쪽 끝까지 밀고 아직 차가운 물줄기는 바닥을 향한다. 훈훈한 기운이 느껴진다면 따듯한 겨드랑이를 파고들듯 이마부터 물줄기에 들이민다. 샤워기에서 이어지는 따듯한 물길이 미간을 타고 흘러내리고, 점차 달아오른 머리와 가슴을 통해 손끝, 발끝까지 퍼져가는 혈액의 온기를 느끼며, 좀 더 움직이기 수월해진 손가락을 얼굴과 이마 그리고 정수리까지 한 번에 빗어 넘긴다.
아마 치열한 일상에서 영원-미래는 해야 할 일이 빼곡한 직선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생긴다면 평화롭게 돌고 도는 곡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깊은 여유-우울 안에서는, 곡선이 이룬 원의 광활함에 압도당하기도 한다. 그럴 땐 다시 커다란 원을 꾹꾹 눌러 담아 점으로 만들어 지금에 집중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당장 내가 위치한 지점에서 다른 곳을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크지 못하다. 그저 잠시 멈춰,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발 밑을 살필 뿐이다. 직선과 곡선, 그리고 원과 점. 지금 나는 어떤 도형 위에 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