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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Sep 21. 2020

생의 끝에 나를 세우고

강산무진 속 표지

                                               

  『강산무진』을 읽으면서 나는 삼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의 끝에서 담담하셨을까?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다 알 순 없으나 주인공의 발걸음을 좇으며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헤아리고자 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렇게도 허망하게 질 수 있을까? 주인공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죽음이 조금 빠르고 늦는 것은 별 차이 없는 것 같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여한 없이 잘 살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강산무진』은 오십칠 세의 직장인 김창수가 어느 날 의사로부터 간암 판정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암’이라는 현실 앞에서 담담하게 삶을 정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저당 잡힌 돈으로 그동안의 관계들을 정리하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다. 돈으로 얽히지 않았다면 서로 만날 일도 없는 것인지, 남자의 관계라는 것이 딸이거나 아들, 이혼한 아내일 뿐이다. 


 ‘가족들 이외에는 암을 알리지 마십시오. 암환자라는 걸 주변에서 알면 신변을 정리할 때 불이익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라는 의사의 주의사항을 지키며, ‘퇴직에 관련된 정산사항’을 알아본다. 적금을 해약하고 주식을 처분하며, 이혼한 아내의 위자료 잔금을 정산한다. 집을 처분해서 자녀에게 나눠 갖도록 한다. 산소를 정리하는 일도 돈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돈이 필요없는 감정 정리는 어떻게 하나. 울고불고 애통해하고 원망하고 절망하며 희망을 믿다 또 주저앉고, 이 정도는 해야 떠들썩한 죽음이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모든 걸 생략하고 자신이 가진 재산 전부를 내놓고 시작하는 정리도 나쁘지 않게 다가온다. ‘돈은 죽음을 관리하는 가장 문명화된 도구다’고 책의 끝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말한다.


 아버지는 일기를 쓰고 계셨다. 슬쩍 들춰 본 일기장에는 중년의 아버지가 있었다. 

  ‘오후에 결혼식장 갈 일이 있는데 공판장에 내야 할 토마토가 많아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 잔 마실 짬이 날지 모르겠다.’ 


 일기장을 덮고 숨죽여 울었던가. 농부로 사는 아버지의 삶이 왠지 나를 비롯한 가족 때문인 것 같고, 훨훨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지 않았다.


 평생 가족의 생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의 삶이 좀 편해 질 무렵, 또다시 아내를 돌봐야 할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아내의 기저귀를 갈고 밥을 챙겼다. 


 지금 요양원에 계신 엄마의 입소 비용이 아버지가 남긴 돈으로 지급되고 있다. 입소비를 이체할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떠올린다. 평소 “사람은 제 분수껏 사는 것이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한 사람의 생애라는 것이 그가 살아낸 삶의 태도와 자세, 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행동과 말, 가치로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식이 본 아버지는 훌훌 자신의 삶을 홀가분하게 정리하고 가셨을 것 같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남긴 돈은 없다. 하지만 평생 살아온 삶의 자세로 모은 돈이 아내를 위한 노후대책이 되어 소중하게 쓰이고 있는 걸 보면 아버지는 분명 모든 자식에게 골고루 맞춤한 유산 분배를 하신 것과 다름없다.  


 내가 자식들과 이 세상에 남길 것은 무엇일까? 지금부터 치열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죽음이 존중받기 어려운 세상이다. 철저히 본인의 것이지만, 그 이후의 모든 절차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죽음이란, 죽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후부터 발생하는 감정이 아닌가 싶다.


 김창수는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산책’을 하며 집 근처 박물관에 들러 조선 후기 회화 특별전’을 관람한다. 산수화 ‘강산무진도 江山無盡圖’ (조선후기 화가 이인문)를 보면서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곳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살아온 생이 얼마이든 떠돌 듯 정처 없이 살다 가는 것, 간혹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처럼 내가 본 ‘유년을 뒤흔든 충격이며 혼란’ 같은 어떤 선명한 기억 몇 개쯤을 환영처럼 가슴에 떠올리는 것,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잠시 몸을 담갔다가 가는 것, 그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이모들의 그 희뿌연 무채색의 삶’에 ‘양갈보’라고 불렸던 여자들의 향기를 ‘날카롭고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한세상 살다 꽃 지듯 가는 것인지도.


 ‘밥 때가 되어서, 젊은 주부들이 놀이터의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주인공 김창수는 ‘시간으로부터 버림받은 몸이 또다른 시간에 실려서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삶의 생생함으로부터 얼마쯤 비켜 서 있는 것이다. 어두워지는 골목에 나만 남겨지고 다 들어가버린 그 막막함이 죽음을 앞둔 자의 마음은 아닐는지.


 책을 읽고 나니 사는 일이 허무하다. 내 나이가 주인공 김창수의 나이와 비슷해서일까?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생각할 나이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일이 끝없는 탄생과 소멸처럼 덧없다 해도 지금을 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임은 분명하다.


 ‘호스피스 요양제도가 잘 되어’있는 아들이 있는 미국행을 선택한 김창수의 삶은 결국 결혼한 딸에게 자신의 남은 날들을 맡기고 싶지 않은 선택이기도 했다. 이곳 서울에서의 삶을 다 정산하고 가지고 가는 돈이 아들 몫이 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자신이 가진 돈으로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처분하고 나누었듯이 이후의 날들도 그렇게 담담하게 살아낼 것이다. 


 이 책 『강산무진』은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유구한 산천으로 거듭 피어나는 한, 인간의 삶이 그렇게 허망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과 위안을 던져준 책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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