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한정원, 시간의 흐름(2020) 을 읽으며 나는 ‘산책의 쓸모’에 사로잡혔다.
작가 한정원은 ‘산책의 쓸모를 생각하고 걷는 사람을 ’산책자’라고 부르는 건 내키지 않는다. 산책의 결과로써 쓸모가 발생하는 게 사실이라도 말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책을 산책하는 동안 가슴이 시리다. 때로 생이 먹먹해지는 쓸모를 줍고, 생각과 공감, 회색의 그림자, 저녁의 빛을 주우며, 산책의 쓸모를 맘껏 걷고 또 걸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읽은 시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늘에 주저앉고, 바람을 들이며, 밝음 쪽에 서 있다가 문득 그림자의 서늘함을 떠올렸다. 주변의 어떤 소리를 듣다가 그 소리의 파장에 귀를 모았고, 호수의 물결을 따르다가 지난밤 물결이 겪었을 추위의 무늬를 이해하려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또한, 바람이 가는 방향의 내력을 미루어 짐작하려고 애썼다.
산책은 때로 의자가 필요하다. 마음을 걸러야 할 때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여러 번 의자를 찾아야 했다. 숨을 고르기 위해서. 작가의 글에 발목이 잡혀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으니까.
작가의 마음 결에 공감하며 밑줄 그었던 부분이 많았던 ‘시와 산책’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세사르 바예호, 「여름」,『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다산책방(2017)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P68
늙는 일이 내가 늙고 싶다고 늙어지는 게 아님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늙음이 사실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안 것은 함께 차를 마시고, 차가운 수박을 깨물던 사람이 더는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알았다. 같이 밥 한번 먹고 싶은 기회를 주지 않고 가버린 쉰 살의 힘겨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 친구를 보면서, 좋은 사람끼리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사는 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늙고 싶어도 늙지 못하는 삶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보고 접하고 겪으면서 사는가.
늙음을 보는 시선에 관대해진 것은 내가 젊지 않다는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늙은 그들은 내가 살아내야 할, ‘사는 것 거기서 거기인 삶’을 이미 통과해 온 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해야 아름답게 늙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야 비로소 늙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기꺼이 나는 늙고 싶다.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지혜로워지거나 선량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은 시의 한 행에 다음 행이 입혀지는 것과 같다.’p25
시를 다시 보고, 새로 읽게 하며, 시를 행하게 하는 문장이다.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살아내는 삶일지 모른다. 쉽지도, 어렵지도, 그러나 만만하지 않은 시처럼 삶이 은유를 버무려내는 시 같으면 좋겠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p55
‘과일 아저씨’와 ‘담배 아저씨’를 돌아보며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작가의 우정은 타인에 대한 ‘외로움의 가능성’을 열었을 때 다가왔고 보였다. 다른 사람의 외로움에 넌지시 마음을 얹는 일은 그들을 잘 살펴야 보이는 일이다. 그들의 마음에 내 마음을 보태야만 결국 우정이라는 감정과 만난다.
‘세상과의 결속에서 틈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내면이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영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겠다는 의지 같은 것’p125
산책은 세상을 읽는 틈 같다는 생각을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확한 시간의 산책을 멈추지 않은 철학자 칸트와 같은 산책자는 아니지만, 나는 가끔 산책을 원한다.
산책할 때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내가 세상과 결속하고 연결하는 틈을 메우기 시작하는 행위로 직결한다. 타인을 바라보며 그의 삶을 그려보고, 사물을 보며 그것이 온 과정을 더듬는다. 그러면 보이고 얻게 되며 비로소 산책의 행위는 내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작가의 의지처럼 ‘나의 존재와 끊어지지 않으려 분투’하는 것, 나는 그것을 산책으로부터 얻는다.
작가의 산책은 결국,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만나는 일에 산책을 쓰고 있다. 바람을 만나고, 빛과 어둠을 만나며, 물결을 보고, 사람을 보며, 고양이를 통해 생명이란 것의 의미를 헤아린다. 그러므로 그에게 산책이란 살아 있는 한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하는 행위가 된다.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하는 ‘획일적이지 않’은 행복을 행 하는 행위가 바로 산책이다.
나는 기꺼이 ‘산책의 쓸모’를 행하며 한정원이라는 작가와 함께 시와 산책을 동행한다. 산책이 끝날 무렵,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p97
따뜻함이 전해지는 말이다. 그 온기를 믿고 살아볼 일이다. 늙음이 오는 시간을 마주하기 위해, 오후의 빛을 모아야겠다.
잘 늙는 일도 어쩌면 내가 지속해서 도전해야 하는 아름다운 행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