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 다산책방'을 읽고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문장에 빠졌다. 처음 『맡겨진 소녀』를 읽고 그 섬세한 결에 주눅이 들었다. 곧바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주문했다.
단편 소설에 몰입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저 그러한 삶의 단면을 차갑고 명징하게 파고들던 작가들의 밀도 있는 문장들에 매료되었다. 장편 소설이 주는 긴 호흡이 내겐 버거웠었는지 모르고 혹은 드라마틱한 서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향도 한몫했겠다고 짐작한다. 하여 단편 소설을 썼다 지우며 스무 살 무렵을 통과하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시를 만나게 되었다. 시에서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시는 여전히 내게 닿을 수 없는, 잡히지 않고 먼 곳으로 내닫는 바람 같은 것이다. 시가 삶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써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클레어 키건의 글에서 시를 읽었다. 그녀의 정서는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움 속에 기필코 살아내야 하는 삶의 투명함을 곳곳에 숨겨 놓고 전율하게 했다. 읽는 중에도 잠깐의 호흡이 필요했다. 주인공 펄롱의 생각과 호흡에 맞춰 긴 심호흡을 여러 번 해야 했다.
사는 일이 대단한 서사가 없어도 잔잔하게 이는 파문을 바라보고 다독이고 받아들이며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펄롱의 삶에도 시간의 더께에 묻은 상처가 고여있다. 그 상처는 펄롱의 삶을 늘 멈칫거리게 했다.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날이 있었던 펄롱. 가끔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펄롱을 사로잡았고 펄롱은 홀로 낡은 옷을 입고 어두운 들판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였을까? 펄롱은 찻잔을 손에 들고 창가에 서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멀리 보이는 강을 바라보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을 구경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알았다. 펄롱에게 확실하지 않은, 즉, 아버지가 누군지 정확하게 모르는 태생의 궁금증과 자기가 누군지 알고 싶은 정체성에 대한 결핍과 정서가 살아가는 내내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음을, 그리하여 결국 수녀원의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꼈기 때문에 그는 아이를 데리고 다섯 명의 딸과 아내가 있는 집을 향해 어둠을 뚫고 있었다.
문득 펄롱의 평범한 삶에도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어떤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음을 보았다. 결국 어린 소녀를 데리고 올 수 있었던 일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삶과 맞바꾸는 용기 있는 선택이었음을 알았다. 어쩌면 이 선택이’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 펄롱임에도 불구하고 책임과 위험을 자기의 삶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살아내는 일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적절한 수용을 통해 성장하면서 한 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펄롱이 잠시 길을 잃고 헤맬 때 골목에서 만난 노인이 말했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살면서 가끔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있다. 그 용기가 개인을 위한 것이든, 공공을 위한 것이든, 용기로 인하여 어쩌면 삶에 위험한 요소가 따른다 해도 주저하지 않고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안다. 거기에 시 詩의 자리가 놓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선택한 길에 꼭 필요한 소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시는 결코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시는 사람을, 사물을, 공기 중에 흐르는 바람과 그것들의 숨결을 이해하고 같이 호흡하려는 의지가 언어를 빌어 나타나는 삶의 간곡한 무늬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한 남자가 어느날 단행하게 된 사건이 결코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나, 어쩌면 또 지극히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펄롱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많은 걸 시사하는 말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는 삶을 잘 가꾸면 작고 보잘것없는 삶에도 어느날 쨍한 빛이 스며들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단호하게 직시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지극히 사소한 것들로 채워지는 보통날의 삶에도 찌르듯 날카로운 공기가 스며 있음을 우리는 문득 알아차리곤 한다. 그래서 산다. 또 오늘을.
클레어 키건의 책이 내게로 와 삶의 투명함을 손짓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