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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Apr 20. 2024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날의 시선 21

 벚꽃이 다 졌다. 뭉게뭉게 구름 일던 하얀 설렘이 끝났다. 찬란한 낙화를 시작으로 연초록이 자리 잡는다. 이제야 비로소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꽃이 오는 길을 더듬었듯 초록이 오는 시간을 마주 본다. 빈 가지로 서 있을 때도, 초록을 이고 서 있을 때도 사계절 내내 나무의 존재를 잊은 적 없다.


 나무는 스스로 얻는 위안이다. 가만히 있는 존재이면서 늘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가 나무다. 말 없는 스승이다. 사려 깊은 어른의 모습을 하고 언제 어디서든 괜찮다, 괜찮다, 다정한 손을 내민다. 그러한 크고, 깊고, 넓은 나무의 쓸림을 바람으로 읽고 언어로 쓴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던가. 


‘저녁 무렵 바람에 솨솨 소리를 내는 나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방랑벽이 마음을 휩쓴다.’라고. 또한 ‘그것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 그리고 삶의 새로운 비유들을 향한 동경이다.’라고. 


 이 문장이 참 좋았다. 나무가 바람에 쓸리는 풍경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슴에서 윙윙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곧 ‘삶의 새로운 비유들을 향한 동경’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바람에 쓸리는 나무는 한 편의 시이고 음악이고 소설이며 생의 촘촘한 무늬가 결집한 시간의 결이다.  


 태어난 마을의 집 앞에 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진즉에 그곳을 떠났으나 그 나무를 생각하거나 떠올리면 어린 날의 내가 보인다. 팍팍하기 짝이 없었던 청춘의 목마름을 지켜보았고, 사십 대의 어느 날 팽나무 아래 앉아 목 놓아 울던 늦가을의 밤도 함께 해주었던 나무다. 


 팽나무는 조용히 내려다볼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의 든든한 격려와 지지를 받은 듯 한껏 홀가분한 마음을 갖고 그곳을 떠나 씩씩하게 살았다. 이렇게 깊고 품 넓은 위로가 또 있을까 싶은 게 오랜 세월을 산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받는다.


 한때 죽어라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열망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 내게 미루나무는 유혹이었다. 멀리 우뚝 서서 끝없이 손짓했다. 여기 말고 다른 세상을 꿈꿔 봐. 이곳은 네가 아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야. 밭을 지나 논을 지나 멀리 철길 위로 몸살 하듯 기차가 지나갔다. 내가 선택했던 것은 다른 장소로의 떠남이 아니라 고작 내 안으로의 여행이었다. 


 읽고 쓰고, (여기에서 쓰는 행위는 숱한 낙서였고 회의였으며 반성이었다.)보고, 듣는 일로의 여행이었다. 결핍을 무기로 그때만큼 충만하게 살았던 날이 또 있을까? 그 여행은 낯선 곳으로의 동경, 바로 그것이었다. 가지 못하니까 더 가고 싶었고, 읽으니 더 읽고 싶었으며, 쓰면서 더 쓰고 싶었다. 그때의 간절한 동경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초록이다 못해 새파란 푸르름에 가까운 대나무 군락지가 둘째의 태몽이었다. 이후 대나무는 유난히 마음을 잡아끌었다. 대나무는 강직함과 곧음, 부드러움을 함께 간직한 나무다. 칠흑같이 깊은 밤, 대숲 쓸리는 소리를 들었다면 알리라.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산다는 일의 겸손함을 일깨우는지, 푸르게 용기를 주는지.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곳에 실제로 느티나무가 있었던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여기서 말하는 느티나무는 추상적인 나무다. 아니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 나무라고 해야 할까?


 느티나무 독서회에 처음 나갔던 날의 두근거림을 지금도 기억하는 걸 보면 내가 그곳 독서회로부터 받은 그늘은 향기롭고 깊었다. 내 읽기와 쓰기가 구체적으로 향해졌던 곳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난 후 토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각자 어떤 방식으로 인식되고, 해석되는지, 책을 읽고 난 후 달라지는 내 변화와 행동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알았던 곳이었다. 또한 내가 글을 쓰는 일에 몹시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된 곳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만났던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무를 본다는 일은 사람을 본다는 일이기도 하다. 마당에 느티나무가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는 게 중요한 사실이다. 십여 년 동안 독서회에 참여했다. 해마다 문집도 만들고 인문학 여행도 다녔다. 떠나는 사람도 새로 오는 사람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맞이하며 독서회는 의젓하게 넓은 그늘로 성장했다.  


 느티나무 독서회를 떠나 이사올 때 독서회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손 편지를 써서 내게 전해 주었고, 독서회가 선물한 감사패도 받았다. 지나고 보니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듯한 작고 투명한 감사패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마치 내 지난 어느 한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기라도 하는 듯해서 뭉클한 마음이 든다. 내게 느티나무는 그렇게 사람의 향기로 존재하는 상징적인 나무이다.


 나무는 사람을 모은다. 아니, 사람이 나무 곁으로 온다. 곳곳에 아끼는 나무들이 몇 그루 있다. 지나다니는 길가에 우뚝 서 있는 후박나무 한 그루, 언젠가부터 내 나무라 정하고 오갈 때마다 눈인사를 보낸다. 후박나무가 두툼한 잎을 반짝이며 건강하게, 묵묵히 살고 있는 걸 보는 것으로 뿌듯하고 족하다. 


 양버즘나무라고도 불리는 플라타너스의 수피는 예술이다. 어떻게 그런 무늬를 표출할 수 있는 것인지 볼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한다. 뚝, 하고 떨어지는 가을날의 잎은 그 어떤 나무의 이파리보다 가슴을 철렁이게 한다. 플라타너스 잎이 지면 어디선가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곤 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는 보았다. 집 뒤꼍에서 자두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나무 중 왜 자두나무였을까. 미루어 짐작하건대, 어느 장날 유난히 붉은 자두를 매달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 아빠의 손길로 자란 오종종했던 자신의 오 남매를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 하여 누구라도 와서 붉게 익은 자두 한 개 따먹으면서 아빠를 떠올려 보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처음 나무를 심었던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봄이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나무 한 그루쯤 마음에 두고 살지 않을까. 나무도 세월을 따라서 좋아하거나 관심을 두는 나무가 조금씩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앵두나무, 보리밥나무, 그네 타며 놀던 뒷산의 소나무, 이파리가 멋져서 자꾸 올려다보는 팔손이나무와 갈참나무, 서울 어느 공원에서 보았던 동글동글한 하트 잎을 달고 있던 계수나무 등 세상 모든 나무가 저마다 다른 모양의 잎을 달고 초록을 쟁인다.


 요즘 바라보는 산등성이 모습이 예쁘다. 어울렁더울렁 사람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의 모습 같다. 오래된 나무의 진한 초록에서부터 이제 막 연두색 싹을 틔우는 나무, 조금 더 성장하여 초록이 자리 잡은 나무, 청년의 모습으로 훌쩍 커버린 나무들이 다투어 숲을 이루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마치 이야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공동체의 모습인 듯하여 보는 눈이 싱그럽고 대견하다. 


 큰 그늘이 아니라 멋스러운 그늘을 지닌 나무이기를 바라곤 한다. 이야기를 가진 나무, 향기를 지닌 나무, 곁에 있으면 말이 없는 잔잔함에 나도 모르게 휩쓸리고 스미는, 그런 나무를 꿈꾼다. 휘어짐을 따라 지그시 몸을 기울여도 좋을 나무를 곁에 두고 싶다. 일 년 중 나무가 가장 뚜렷이 보이는 시기이다. 덩달아 나무 안으로 깃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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