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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일 - 조용한 침입자, 노란색

보통날의 시선 58

by 호랑
보통날의 시선 58 노란색 그림.jpg


언젠가부터 노란색이 좋아졌다는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마음 안에 오래 머무는 거리가 떠올랐다. 그곳을 떠나온 지 십오 년의 시간이 훌쩍 넘었으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일 중 노란색 거리를 잊을 수 없는데, 운영하던 학원 앞 가로수의 노란 은행나무 거리이다. 시골 읍내 거리에 11월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면 잔치가 벌어진 듯 온 동네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나는 듯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물든 은행나무 얘기를 주고받느라 거리가 노랗게 소란스러웠다. 어디에라도, 누구에게라도 초대된 듯 왁자지껄 흥에 겨운 몸짓으로 거리를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며칠 노랗게 보내다가 하나둘 떨어져 날리는 잎을 보며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곤 하는데,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우짜노 점마 다 떨어지겠다. 찐짜 아까비.” 라며, 아쉽고, 안타까운 구수한 사투리가 거리를 굴러다닌다. 한바탕 축제가 끝나면 노란 입맛을 다시며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가슴에 들어온 노란색을 등대로 삼고 또 일 년을 잘 살아낼 것이라는 확신을 하곤 했다. 가슴으로 들어온 빛은 사는 내내 건강한 힘을 내게 하니까.


친구는 가벼운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렸다고 한다. 오랜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친구였다. 사실 친한 친구라도 별 소식 없으면 서로 잘 살고 있는 줄 안다. 일부러 약속을 잡고 만나야만 얼굴을 보곤 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근황을 알고 조금 미안하다.


“지난여름 너무 힘들었어. 약 부작용까지 와서 응급실도 갔었어. 그런데 모처럼 밖으로 나와 노란 은행나무를 보니 참 좋다. 요즘 들어 노란색이 겁나게 좋아졌어. 이 색깔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나는 부지런히 내가 알고 있는 은행나무를 찾아 운전했다. 마침, 기우는 햇살에 비친 은행나무잎들은 노란색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색깔을 보여주었다. 감탄하며 올려다보는 친구의 목덜미 잔주름까지 밝고 환하여졌다. 그래서 좋았다.


노랗게 노랗게 피어 있는 산국 무더기에서 진한 향기가 풍겼고, 꿀벌은 마지막 꿀을 따느라 정신없이 잉잉거렸다. “산국으로 꽃차를 만들어 마시면 좋다.”라는 말도 나누고 기울고 있는 햇살에 이마를 맡기며 찡그린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끼는 플라타너스 길도 공개했다. 시기를 놓쳐 단풍이 작년만 못해도 그 길 끝에서 만난 탁 트인 금강을 보면서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친구의 우울이, 불면이, 공황장애가 훅, 바람에 날려 가기를 바라며 함께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금강물이 놀란 듯 바람 한 줄기 날리는데 억새가 하얗게 몸을 꺾는다.


친구를 집 앞에 내려주고 오면서 노랗게 저물고 있는 긴 하루의 모습을 본다. 카페에서 보았던 마리골드, 언덕에서 보았던 자잘한 산국, 폭포수처럼 떨어져 날리던 은행나무,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찾아가 마시던 나만의 플라타너스 길 벤치, 저녁 무렵 떨어지는 햇살까지, 오늘은 모두 노랗게 물든 시간과 함께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친구의 오늘 하루가 실컷 본 노란색으로 하여 부디 환하게 밝아지기를 바라고, 빛이 있다면 우리는 기어이 외롭고 어두운 삶으로 자기를 끌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기를 바라는 마음도 가져본다. 추워지기 전에, 아니 가을이 가기 전에 그녀의 안부를 서둘러 묻겠다는 다짐도 한다. 조용한 침입자, 노란색이 사람의 심장을 쿵, 두드리는 늦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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