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59
모든 사물이 서서히 가지런해진다. 치열했던 시간이 바닥에 뒹굴고, 만남과 헤어짐의 자리가 극명하다. 나무와 식물들의 준열한 규칙이 빈 하늘로 담긴다. 뻗은 자세가 거침없다. 의연하다. 이별을 치르고 난 뒤의 핼쑥함이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공중을 안고 살아갈 일만 남았다. 공중의 외로움은 넉넉하여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지 않는다. 가을의 시간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겨울로 이어지는 길목의 안내자가 되어 다가올 겨울을 더 분명하게 채워줄 거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 ‘태양에 대한 기억이’에 나오는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찾아올 수 있다’라는 한 문장이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서두르듯 겨울이 들어섰다.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거리엔 아직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맨드라미는 붉게 햇살을 맞받아치고 있으며, 길모퉁이마다 긁어모은 낙엽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김장하고 바깥으로 나온 배추며, 무쓰레기가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 앞을 어슬렁거리는 동네 고양이의 발목이 눈에 밟히기 시작할 겨울이 이제 꼼짝없이 비집고 앉았다.
이맘때 듣는 피아노 음악이 있다. 물론 여름과 가을을 나는 동안에도 이따금 찾아 듣지만, 일상처럼 듣기는 요즘이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사는 일이 별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얻는다. 무겁지 않다. 가벼워서 그런 게 아니다. 삶의 무게를 자꾸 덜어내고 싶게 한다. 바깥에서 마주친 상심한 일이 그의 음악에 묻어가곤 했다. 그래서 자주 들었다. 기온이 내려가 쌀쌀한 날씨를 느끼면 그의 피아노 선율은 깊숙하게 전율한다. 그 어떤 차가운 생과 독대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음을 저절로 자연스럽게 깨닫게 하는 그의 음악을 오래 듣는다. 바로 이탈리아의 피아노 연주가이며 작곡가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이다.
아껴서 먹는 간식처럼, 읽을 때마다 설레, 두고두고 읽고 싶은 시처럼, 혹은 문장처럼, 좋은 사람이 늘 거기 그렇게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어느 한 기억이 사는 내내 향기롭게 나를 붙드는 것처럼, 그의 모든 연주곡을 아낀다.
정색하고 앉아 듣지 않아도 된다. 무심히 듣는다. 아무 곡이나 꺼내 잠깐이라도 듣는다. 옆에 앉은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카락 한 올을 발견했으나 그냥 두기로 하는 순간처럼(대화의 흐름이 순식간에 흐트러질 수도 있으니까.) 그의 피아노곡은 그냥 두고 볼 때도, 가만히 있어 줄 때도, 잘 견디고 있을 거라고 믿어주는 마음도 필요함을 넌지시 건넨다.
가을의 이야기를 미처 다 말하지 않은 채로 12월에 들어서고 말았다. 군더더기가 필요 없는 밀도 높은 충만함의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가을은 가고 말아, 이미 겨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긴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서서 ‘루도비코 에이나우디’를 듣는 일은 어쩌면 겨울이 겨울 답기를 원하는 마음, 제발 어정쩡하게 이 겨울을 보내지 말자는 주문을 지문처럼 새기고 싶은 마음, 또 한 편으로 누군가의 시린 마음 쪽으로도 온기가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두드리며 그의 음악을 일 순위로 둔다.
맨드라미를 그렸다. 내 지난가을의 시선이 맨드라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