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선 - 아빠와 딸 -

보통날의 시선 60

by 호랑
보통날의 시선 60 등대가 있는 그림.jpg

사거리 신호대기 중 하얀색 포터가 내 차보다 조금 앞서 옆 차선에 정차했다.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어 보니 운전석 뒤 바깥 공간에 페인트로 쓰인 글자였는데,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뭔가 더운 감정이 올라왔다. 이런 문구였다.


- 딸이 사줬어요 -


아마도 일하는 아빠를 위해 딸이 사준 것 같았다. 얼마나 고맙고 귀했으면 글자를 새겨 자랑하고 싶었을까 싶다가, 한편으로 딸이 사줬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아빠의 삶을 향한 각오를 새긴 것은 아닌가 싶다가, 그것도 아니면 딸을 향한 애틋한 아빠의 사랑을 말로 하지 못하고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무뚝뚝한 아빠의 소극적인, 그러나 한편으로는 굉장히 적극적인 표현으로 보였다. 신호가 바뀌어 포터는 멀리 떠났는데 뿌듯함이 차올라 내내 즐거웠다.


시중 가격으로 1.5톤 포터의 신차 가격은 대략 2,500만~3,000만 원가량이라고 한다. 잘나가는 딸이라 해도 선뜻 아빠한테 그 가격의 차를 구매해서 드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아빠를 위해 차곡차곡 성실하게 모아둔 돈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미루어 짐작도 해본다. 단순히 어느 집 딸의 선행이라고 하기에 남 일이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가슴이 더워진 것이리라. 혹여 지나다가 그 차를 다시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었다.


얼마 전 끝이 난 ‘우리들의 발라드’라는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을 챙겨 보았다. 응원하고 싶은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바로 올해 열아홉 살인 ‘제주 소녀 이예지 양’이다. 일면식도 없으나 처음 보는 순간 아, 나는 이 소녀를 응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회마다 빼놓지 않고 마음을 모아 주었다.


그 소녀를 주목하게 된 것은 아빠를 통해 가수의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듣고부터였다. 택배 일을 나가는 아빠의 출근 시간과 맞물려 초등학교에 가는 3년 동안 제주도의 바닷가 풍경과 아빠의 옆모습을 보면서 임재범의 ‘너를 위해’를 자주 들었다고 했다. 할머니와 아빠 손에 키워진 예지에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라며 아빠는 딸의 꿈을 위해 아낌없는 응원과 지지를 해주었다. 예지가 처음 선택해 부른 노래는 당연히 ‘너를 위해’였다. 가수 임재범이 부를 때의 전율과는 다르게 예지의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임재범의 목소리를 잊게 했다.


아빠는 울었다. 오디션이 열리는 내내 관중석에 앉아 딸을 응원하던 아빠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그 울음은 대한민국 평범한 아빠의 울음이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파이널 라운드까지 오는 동안 예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린 친구의 단단한 내공에 어른들도 놀랐다. 그녀가 선택한 윤종신의 ‘오르막길’은 최고였다. 가사에도 있듯이 이제 예지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래 지켜보면서 응원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아빠와 딸의 서정은 남다르다. 엄마와 딸하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정서가 있다. 앞서 포터 트럭에서의 아빠와 딸, 예지 양과 아빠의 일이 공교롭게 겹치며 지난 몇 주간의 시간이 흐뭇하고 좋았다.


오래 전의 일이 떠오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기 전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기 위해 떠나는 딸을 배웅하고 돌아와 아빠는 한참을 흐느껴 우셨다는 얘기를 듣고 나 또한 오래 울었던 기억이 새롭다. 삼십여 년 전의 아빠는 첫딸을 시집보내고 어떤 마음으로 우셨던 것일까. 나 역시 딸과 아들을 출가시켰으나 그때의 아빠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아빠들의 품은 넓고 깊다. 바다 위의 등대처럼 언제든 아빠를 믿고 돌아오라고 온 힘을 모아 반짝이는 세상 가장 다정하고 따뜻한 항로표지다. 존경하는 사람의 처음에 놓이는 아빠지만 그 존경의 마음을 다 전하지 못하고 아빠는 총총 멀리 가셨다. 아빠와 딸의 관계는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존재임이 틀림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을의 시선 -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