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봄날 - 숙제 검사

보통날의 시선 67

by 호랑
보통날의 시선 67 산수유 그림.jpg

요즘 치과 진료를 받는다. 잇몸이 부어 피로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사랑니 옆 잇몸에 염증이 있어서 치과를 오르내린다.


“숙제는 잘하셨어요?”

“숙제요?.”

“제가 숙제 내주었잖아요. 약 잘 먹고, 잇몸 많이 문지르고, 따뜻한 차 많이 마시라고요.”

“아, 그 숙제요. 그럼요. 열심히 했죠.”


치료받는 동안 ‘숙제’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숙제 잘했느냐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나이 들어 누군가 내주는 숙제를 할 수도 있구나 싶으니, 지긋지긋해하던 숙제가 달콤한 추억으로 떠오르는 건 무슨 일인가. 일기 숙제(일기가 중요한 숙제였다), 받아쓰기, 산수 문제 풀기, 국어책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세 번 써오기 등, 몹시 하기 싫었던 숙제들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재미있었고, 자꾸 하고 싶었던 숙제도 있었다. 바로 ‘풍경화 그리기’였다.


겨울방학이 끝나가는 이틀 전에 방바닥은 온통 크레파스와 도화지로 널린다. 밖에선 눈발이 날리고, 바람이 문풍지를 때리는 날이었을까. 장작을 넣은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 겨울풍경화를 그리느라 낑낑거리는 동안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언니가 눈사람을 그리면 동생이 따라 그리고, 누나가 연을 그리면 막내가 따라 그렸다. 키우는 강아지 그림을 꼭 넣고 싶은 막내는 사슴같이 그려진 강아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입이 댓 발이 나오곤 했다.


눈사람의 몸은 기울었고, 얼굴은 찌그러졌으며 기껏 그린 강아지는 사슴과 닮았다 해도, 풍경을 완성했다는 뿌듯함에 엄마 아빠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에 숙제는 끝났고, 우리는 들판으로 달렸다. 숙제를 마무리했다는 홀가분함이었을까? 우리들의 소란과 함성은 크고 높았다. 있을 때 얼른 해치우고, 없으면 더욱 좋은 것이 숙제다.


농한기여서 한가로운 아빠는 마루에서 연을 만들었는데, 대나무를 얇게 깎아 만든 크고 작은 연살의 낭창낭창한 느낌이 나는 좋았다. 아빠는 연에다 색깔을 칠하기도 했다. 남동생들은 방패연을 날리고, 우리 세 자매는 가오리연을 날렸다. 연이 높이높이 날아도 우리의 연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아빠가 정성 들여 칠한 색깔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흔들며 하늘을 날고 있는 연을 보면 마치 춤추는 가오리 한 마리를 실제로 보는 듯했다. 동네 아이들과 낮은 산과 들판을 누비며 연을 날리던 날이 아득히 멀다. 연 만들어 오기 숙제가 있었다면 아마 아빠가 만든 연을 가지고 가 자랑을 했겠지. 어린 날의 숙제는 부모의 도움이나 옆집 언니 오빠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성가시고 지겹다고 하면서도 숙제 검사 받을 때가 좋았을까? 나이 드신 분들 옆에 있으면 종종 듣는 말이 있는데, 대체로 비슷하다.


“나는 그럭저럭 숙제 다 혔어. 딱 한 가지 빼고 말여. 잘 죽는 것 말고는 읎어. 고것이 제일 큰 숙제랑게.”

“나도 그려. 열 가지 숙제 다 하고 보니 죽는 숙제 하나가 떡, 하니 남았더라고.”


그렇구나. 죽음이라는 숙제가 인간에게는 있구나. 그것도 아주 늦게, 인생을 어느 정도 살고 난 후에야 찾아오는 가장 어려운 숙제, 검사받을 일 없어도 부담이 큰 숙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내 손으로 해야 하는 숙제, 절대 거스를 수 없는 부채 같은 숙제, 인생 최대의 숙제를 우리는 안고 있다. 결코 즐거울 수 없으나,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숙제라면 두 눈 질끈 감고 열심히 해야 할 일이다. 따지고 보면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평생을 끌어안고 온 값진 숙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모든 과정이 그 숙제로 제출되는 것이니까.


“귀찮아서 숙제 안 하고 한 대 맞을 거야.”라고 말했던 동생이 있었던가. 그래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생에 주어진 숙제는 무를 수도, 한 대 맞고 슬쩍 퉁칠 수도 없는 일이고, 공평하고 명백한 지문과도 같다.


차라리 숙제 검사를 받던 시절이 좋았을까. 이제는 오로지 내가 검사해야 할 나만의 숙제가 나를 기다린다. 지금껏 숱하게 해왔던 모든 숙제를 한방에 상쇄시키는 가장 어려운 숙제를 받아놓은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 살아있는 생명이면 누구나 해야만 하는 숙제가 남은 생을 뒤척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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