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할리 Mar 09. 2022

그냥 하는 게 안 되면 어떡해?

작은 계산 실수를 한 것뿐이에요



무엇이 됐건 그건 당신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부디 편안히 잘 자기를.



  제목에 놓여있는 문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습관적인 무기력 혹은 열정 사이에서 휘청이는 누군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른 그에게 손을 들어 반가움을 전하고 싶다. 나도 정확히 그런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인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자.


  당신이 싫어하는 당신의 면면 중에 어떤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기질적인 부분이라는 이야기인데, 왜 갑자기 기질이라는 단어를 꺼내야만 했는가에 대한 변명을 덧붙이고 싶다. 그건 오늘이 2주 만에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었고 진료 중에 나의 기질 이야기가 꽤나 길게 나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하고 싶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한 의지가 하늘과 땅 차이인 사람이라는 게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의 요지였다. 물론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대학생활은 엉망으로 방치해두고 연기를 하겠다고 끊임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레슨비를 번 것도, 기계과를 견디다 못해 결국 뛰쳐나와 도달한 국문과에서는 이미 끝낸 과제를 붙들고 끊임없이 퇴고하던 새벽이 있었다. 이 경험들은 모두 나의 '그런 기질'을 방증하는 경험들이다.


  내 주변에는 꼭 나같이 어떤 대상에 대한 좋고 싫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 극도로 강한 유형과 그래도 해야 하니까 할 뿐인 유형, 그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한다. 그게 드러나 구분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나는 전자인 친구들에게는 엄청난 공감을, 후자인 친구들을 향해서는 굉장한 경탄을 쏟아내는 편이다. 특히 나는 '그냥 하는 거지 뭐.'라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안 되는데 어떻게 해!'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나에게는 안 되는데 해야 하는 일이 쌓여있고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반면 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시간을 절로 쏟아붓게 되는 일을 하다가 하루가 끝나기가 부지기수이고, 그러고 나면 저녁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유형 모두 당연히 삶에서 힘든 부분이 있을 테고 각자의 아픔을 끌어안고 버텨가는 것이 삶이겠지만, 나는 전자에 해당하니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해야겠다. 하기 싫은 일은 버리고 하고 싶은 일에 올인하라는 순진한 말은 좋은 조언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대신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패턴을 재빨리 알아채는 습관이라는 조언을 건네고 싶다. 어느 날 밤, 어딘가에 기대앉거나 누워서 불안에 떨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정작 제대로 한 게 없고 하루를 또 날려버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아, 이러다가 내 인생이 망하는 건가……. 자, 거기서 잠깐만 멈춰보자.


  우선은 깊은 호흡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당신은 방금 작은 계산 실수를 한 것뿐이다. 오늘 한 일 중에 당신을 즐겁게 하는 일, 이를테면 화분을 창가에 내놓는 행동이나 좋아하는 빵집에 가서 웨이팅을 견디고 맛있는 걸 잔뜩 사는 것이나, 에세이를 한 편 쓰거나 하는 일들을 당신은 0으로 퉁쳐버렸다. 몇 줄을 할애해서 더 많은 예를 들어보겠다. 인스타그램에 취미로 그린 그림을 업로드하는 것, 갖고 싶던 연필을 사러 연필 가게까지 찾아가는 일, 빨래와 설거지를 통해 나를 돌보는 행위, 새 타투를 받는 일 등등. 그 모든 것의 안에는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고, 잘 생각해보면 그게 우리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하나하나를 0, 혹은 심하게는 마이너스로 취급하는 당신의 계산은, 미안하지만 잘못됐다.


   면접 준비를 할 열의가 생기지 않을 때, 선행학습을 하고 싶은 기분이 도무지 나지 않을 때,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적당히 하게 될 때, 그런 순간에 당신이 느끼는 죄책감과 불안감은 당신이 내린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 의해 그것들이 '진짜'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아주 예전부터 주입받아왔다. 그러니 결코 쉽게 고쳐지진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나도 이처럼 늦은 밤이 되면 덜컥 찾아오는 불안감을 감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건대, 그런 감정들은 그저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그 감정적 습관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자책이 아니라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일이다.


  무엇이 됐건 당신이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 한 일은 당신을 쉬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고, 안심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오늘은 부디 편안히 잘 자기를.

작가의 이전글 컬러 팔레트 먼저 정해보실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