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찬란한 평범함이라면
나는 평범함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세상에 나를 내던지다 보면 특별해질 거라고 믿던 20대 초반까지의 나는 내 평범함을 혐오했고, 그 시간을 건너오면서 가끔씩 경험했던 여러 번의 작은 반짝거림 뒤에는 매번 지난한 고통이 뒤따랐다. 결국 결과는 기진맥진 너덜너덜한 백기.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 모든 것들을 힘들게,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소화시켜 과거로 명명했다. 그랬기에 나는 내가 조금 뻔하긴 하지만 조금 더 편한 어른 비슷한 무엇(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 양해해 주시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평범을 딛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향해 도약하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 절박함과 아름다움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조용한 눈길로 응원할 뿐.
제목에서 내가 왜 몽돌이 되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말하자면 ‘평범함의 충분한 찬란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데, 어쩌면 나도 내가 평범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평범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겠거니 하고 종종 생각한다. 하지만 수용이 조금 늦었다고 해서 그 감미로움에 대해 노래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글이 써지지 않아 나름대로 고통스러웠던, 그러면서도 허공을 응시하며 쉼 없는 의식의 흐름 안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생각을 포획할 수 있었던 지난 며칠간을 여기에 조금이나마 풀어내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려면 우선 부모님과 함께했던 어느 바다 근처로의 여행 이야기를 조금 꺼내야겠다.
바로 지난주 주말이었으므로 2월 말에 웬 바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다는 언제 봐도 좋다는 건 만국 공통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의견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아무튼 바다 근처에 가면 보통 익숙하게 떠올리는 것들, 이를테면 횟집에 간다거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줍거나 전망대에서 바다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것 같은 평범한 일들을 나는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이라는 다소 근본적인 영향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남들 다 하는 대로 하다가 남들처럼 평범해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주된 이유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조금 달라졌고, 그래서 여행도 조금 달라진 것이리라.
엄마와 아빠는 언젠가부터 바닷가에 가면 돌을 주워 오셨다. 예쁜 조개껍데기도 아니고, 마모되어 보석처럼 영롱한 푸른색 유리도 아니고, 그냥 맨들맨들한 돌멩이들을. 처음에는 그게 뭐냐는 나의 물음에 돌아온 그냥이라는 머쓱한 대답에 싱겁게 웃었었더랬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이게 가족 전통 비슷하게 되어버렸는데, 원래는 그렇구나 하고 바라만 보던 입장이었던 내가 이번 여행에서는 어째서인지 같이 돌을 줍고 싶어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 셋은 결국 돌을 주우러 전망대가 있는 근처 바닷가에 가자는 씩씩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곳은 봄이 문을 두드려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사람들을 모아다가 와락 쏟아놓은 것 같이 활기찼다. 그리고 하나같이 분주하게 사진을 찍고 바람이 불면 웃고 아이 손을 잡은 채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엄마가 말을 건넸다. “너도 사진 찍어 줄까?”
나는 사진 찍는 건 좋아하지만 찍히는 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진 속의 나는 프로 모델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냥 뭐랄까, 어딘가 어색하고, 무엇보다 평범해 보였으니까. 평범한 내 모습이 박제되면 남몰래 특별해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내가 나중에 특별해졌을 때 그 사진은 보기 싫을 게 분명하니까. 아니, 과거형으로 다시, 분명했으니까. 이건 적확하게 과거로 명명된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느라 조금 늦게 엄마에게 대답했다. “응, 여기 설 테니까 이 방향으로 잘 찍어줘.” 사진 찍히는 일은 아직도 머쓱하긴 했지만 의외로 즐거운 일이었다. 바람이 불면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순간에 찍히는 사진은 언제 봐도 유쾌하고 생생하다. 평범함을 받아들이는 일과, 그 속에 숨은 사랑스러운 면을 발견하는 건 다른 일이구나 하는 생각 하나가 내 머릿속을 유유히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사진도 줄 서서 찍는 효율성의 민족답게 꼭 여기서 찍어야만 할 것 같이 생긴 구조물 옆에서 필요한(?) 사진들만 빠르게 찍고, 초록빛 바다를 향한 충분한 경탄을 쏟아낸 뒤에야 우리 셋은 전망대에서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바다 구경은 뒤로한 채 모래바닥에 시선을 고정하고 주울만한 돌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이 그냥 맨들맨들한 돌멩이를 몇 개 주워오는 줄 알았더니만 또 그게 아니었다. 유난히 매끈해서 자꾸만 문지르고 싶은 까만 돌, 보라색 바탕에 색색깔 점들이 찍힌 펑키한 돌, 제리가 탐낼만한 치즈처럼 생긴 돌, 온갖 돌들이 우리 집 돌멩이로 발탁되어 갈 수 있기를 기다리며 모래 사이사이에 누워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몽돌처럼 되고 싶다고. 눈에 쉬이 띄지 않지만 무해한, 그러면서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분명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몽돌처럼. 대화를 나눠보니 글을 쓰는 사람 특유의 결을 지녔거나, 음악을 사랑하는 눈빛을 하고 있거나, 식물에게 말을 거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무해한 몽돌 같은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고, 그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몽돌이 되고 싶다는 작은 꿈을 찾아버린 나는 조금 더 평화로워졌다. 충분히 찬란한 평범을 기꺼이 수용한 채. 여전히 가끔은 불안하고 우울하지만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평범함이 지닌 감미로움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 이 안에 있으므로 그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안온하게 지낼 것이다. 그러다가 유리 단지에 담긴 제각각 다르게 무해하고 아름다운 몽돌들을 들여다보면서, 때때로는 한 녀석을 골라 너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가만히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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