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Her>, 2019 재개봉
당신을 사랑하듯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 없어
온갖 사소한 기념일들을 너도나도 챙기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아웃소싱 하고, 평화롭고 깨끗한 거리 위 사람들은 모두 혼자서 걷고 혼자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아이도 있고 주인공 테오도르처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경험 정도는 하나쯤 가지고 있는 이 영화 속 세계는 쓸쓸하면서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인다. 그런 이유에서 화면 안 시공간의 돌출된 몇몇 설정들을 조금만 걷어내면 지금 우리의 세계와 다를 것이 없는 듯 느껴지는 것이리라.
스스로 손가락을 움직여 어딘가 접속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고립된다. 영화 속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직접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 이런 상황에서는 ‘진짜 관계’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는 일이 자주 생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와 비슷한 피로감을 느끼는 테오도르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운영체제인 사만다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 순간 우리는 이 이야기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테오도르와 관객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함께 고심해 나간다.
물론 우리는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사만다를 객체(her)가 아닌 주체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조언을 얻는다. 하지만 그 힌트가 아니더라도 사만다는 영화 속 그 누구보다도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관객은 똑똑히 목격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인간 그리고 관계에 대한 그녀만의 새로운 시각과, 선율로 그려낸 사진, 함께 바닷가에 있는 기분을 작곡해내는 마음들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우리는 사만다의 '진실된 인격'을 마주하면서도, 결코 메울 수 없는 존재의 간극까지 동시에 경험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모두 겪고 나면 둘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 진짜 사랑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지 않는 것일 테다. 사만다가 들려주는 말들이 바로 우리가 사람들과의 '진짜 연결'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진정성에 관한 의문이 사라진 자리는 이제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대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Her>라는 영화가 소재의 표면만 지나면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객체였던 사만다를 주체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주체로서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 두 사람이 헤어져야 했던 과정들을 겪으며 테오도르는 어떤 커다란 성장을 이룬다. 마침내, 캐서린(전 아내)과의 관계를 실패하게 한 것은 서로를 자신의 원 안으로 끌어들이려던 각자의 아집이라는 것을 직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자신이 만났던 가장 객체인 존재, 사만다로부터 배우게 된다.
결국 이 영화가 (소재의 자체의 참신함을 차치하고라도) 여타의 로맨스 서사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하나뿐인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테오도르의 n번째 사랑을 조명하는 것에 있다. 관객이 이 이야기로부터 경험하는 것은 과거에서 시작해 미래까지 이어질 일련의 러브스토리들 가운데 하나의 지점일 뿐임을 기억해 주시길. 테오도르는 그 안에서 사만다와의 사랑을 겪는 시점에서, 비로소 가짜 편지가 아닌 진짜 편지를 쓰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캐서린(전 아내)에게 보낼 편지 속 말들을 읊조리는 테오도르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가 ‘테오도르의 성장 서사 – 사랑 편’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여정을 함께하며 우리가 진짜 관계를 통해 얻고 싶고, 또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찾기로 다짐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줄곧 모른척해왔던 내면을 향해 시선을 돌릴 기회를 기꺼이 붙잡을 수 있을 것이므로.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